세상에 단 한 번만 존재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지우며 예술의 근간으로 스며드는 순간일 것이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바로 그 찰나를 붙잡는다. 가부키의 화려한 장막 뒤, 한 인간의 피와 숨결로 예술이 빚어지는 잔혹한 과정을 응시한다. 영화가 응시하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다. 인간이 단 하나의 경지를 얻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끌고 가는지에 관한 잔혹한 예술의 계보학이다.는 가부키의 ‘온나가타’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배우 키쿠오의 삶을 조명한다. 키쿠오는 야쿠자
| 다시 군복을 입고, 는 무엇을 ‘보는가’폭력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 나체로 자유를 선언한 , 그리고 과거의 망령을 소환한 을 지나 도달한 는 ‘시선의 영화’다. 다시 군복을 입은 군국주의는 ‘포로수용소’라는 거대한 제국의 밀실 속에 갇혀,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낸다. 이 지점에서 속 사다와 키치조가 국가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숨어든 방은 ‘밀실 속의 밀실’로 읽힌다. 일반적으로 는 오시마 나기사의 필모그래피 중
블랙아웃된 화면 위로 띄워지는 알 수 없는 내레이션과 시대극에 어울릴 법한 웅장한 사운드트랙. 는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아 거대한 세계 안으로 뛰어든다. 영화는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학교에선 다인종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스킨헤드를 한 여학생과 치마를 입은 남학생이 공존하는 생경한 풍경이 보인다. 경찰이 클럽에서 소란을 일으킨 학생들의 얼굴을 찍자 그들의 신상이 모두 공개된다. 나이, 학교, 이민자라는 정보까지. 사회에서는 독재에 가까운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학교는 학생들을 ‘효율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우리가 괴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응시하는 영화다. 그는 진실을 밝혀내기보다, 시선이 어떻게 현실을 오염시키고, 오해가 어떻게 존재를 재구성하는지, 그 위험한 인식의 메커니즘을 세 개의 막으로 가만히 펼쳐 보인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지목하거나 누군가를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 쪽으로 되돌리는 가장 고요한 형태의 윤리적 고발이다. 〈괴물〉은 결국, 괴물을 찾아내는 영화가 아니라 괴물이 생겨나는 사회의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외설과 예술의 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감독 ‘오시마 나기사’의 세계가 특히 그러하다. 오시마 나기사는 세 작품 - , , 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함과 그것이 개인의 몸에 각인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실험했다. 세 영화는 각각 다큐멘터리, 포르노그라피, 공포·멜로라는 전혀 다른 장르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일본 근대가 구축한 제국의 욕망에 대한 비판을 밑바탕으로 둔다.| 적극적 개입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지금은 보기 힘든 단관극장은 동네마다 있던 유일한 영화로의 창구였다. 단관극장들을 떠올리면 무대가 딸린 큰 스크린과 제대로 보수가 되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복도, 딱딱하고 눅눅한 객석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에서 한 영화를 몇 번에 걸쳐 상영하던 그 극장도 바로 단관극장이다. 멀티플렉스라 불리는 지금의 영화관보다 편안함은 덜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기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다. 영화에 비치는 대부분의 피사체는 사라져가는 존재에 가깝다. 빛바랜 과거의 무협 영화와 그 영화 속 사람들, 엇갈림의 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은 안톤 체홉을 연상시킨다. 초기작부터 보인 연극적 요소와 더불어 에서 보인 「바냐 아저씨」가 뇌리에 박힌 것 같다. 특히나 의 배경이 되는 숲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이를 배가 시킨다.「바냐 아저씨」에서 아스트로프는 숲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현재 무차별적인 개발로 인해 숲이 파괴되고 있음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체홉 본인을 투영한 캐릭터인 아스트로프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한 대목이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처음으로 관람한 작품이다.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집으로〉. 베니스 영화제 비경쟁 출품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측에서는 여행·로드무비 장르로 분류했다.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이 작품은 지극히 사실적인 다큐멘터리이지만, 처음과 엔딩 장면에는 넌지시 픽션의 흔적을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이는 차이밍량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약 66분의 러닝타임 동안 대사는 거의 없다. 롱테이크 촬영 기법과 고정적이면서 정적인 화면 구도가 인상적이다. GV(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감독 특유의 ‘여백의 미’가 담겼음을 알 수
하나의 문화 현상이 탄생하는 데에는 단순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2025년 여름, 극장가를 휩쓴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흥행 신드롬 역시 마찬가지다. 인기 시리즈 극장판의 성공은 대부분 감독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는 단독 작품이거나, 독립적인 오리지널 에피소드에 한정되었다. 원작의 긴 서사 중간을 그대로 옮기는 방식은 흥행 실패라는 불문율에 가까웠다. 〈귀멸의 칼날〉은 바로 그 불문율을 깨뜨렸다. 단순히 ‘원작의 인기’나 ‘뛰어난 작화’라는 표면적 이유만으로는 이 열광을 설명할 수 없다.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크
소마이 신지 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을 직접 해설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좇지 않는다. 그의 렌즈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본다. 편집을 통해 시간을 잘게 나누고 감정을 조작하기보다, 인물이 속한 공간과 흘러가는 시간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롱테이크’를 통해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이 연출 방식은 관객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스크린 속 세계를 체험하며 스스로 질문하고 사유할 여백을 열어준다.이러한 소마이 신지의 연출 철학이 가장 완벽하게 주제 의식과 결합한 작품이 바로 (1994)이다. “죽음을
입추를 지나 어느덧 처서를 앞두고 있다. 바닥에 뒹구는 낙엽 없이 가을을 그리는 일은 힘들다. 낙엽을 보고 가을을 연상하지 않는 일도 어렵다. 일본에는 ‘サンマが出るとあんまが引込む(꽁치가 나오면 안마사가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다. 기름이 올라 영양가가 풍부한 가을 꽁치를 먹으면 몸이 튼튼해져 안마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재미난 속담이다. 이처럼 가을과 꽁치는 수어지교다.아이러니하게도 에는 단 한 번도 꽁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제목에 실재하는 대상이 극에는 부재하는 모순적 방식은 오즈 야스지로의 전작에서도 흔히 볼 수
영화 는 소녀 ‘렌’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초등학교 6학년인 렌은 자신만의 세계와 가정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빠가 말하는 ‘이사’가 사실상 이혼임을 알게 되면서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부모의 결별은 소녀에게 큰 상처로 다가오지만, 렌은 여전히 세 명이 함께하는 가정을 꿈꾸며 포기하지 않는다.이 영화는 히코 다나카의 동명 아동문학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의 성격만 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가족 영화나 성장 드라마로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마이 신지 감독은 후반부 초현실적인 시퀀스
홍콩의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 왕가위. 그의 영화는 살아보지 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겪어보지 않은 사랑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랑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하게 된다.외로움의 얼굴왕가위가 보여주는 사랑은 늘 불안정하다. 속 금성무(경찰 223 役)는 여자친구와의 이별 후 하룻밤의 짧은 사랑에 몸을 던지고, 속 장만옥(소려진 役)과 양조위(주모운 役)는 부부라는 사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고독에 잠긴다. 의 장국영(보영 役)과 양조위(아휘 役)는
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주제를 유려하게 드러낸다. 인부들이 언 강을 잘라 이동시키고, 잘린 얼음은 멀리서 보면 균일해 보이지만 클로즈업된 단면은 거칠다. 얼음은 강물을 따라 떠내려와 원래의 자리에 안착하고, 타이틀이 오른다. 이 얼음과 이후 등장할 인물들—하오펑, 나나, 샤오—의 모습이 겹쳐진다.하오펑은 연변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며 처음 등장한다. 값비싼 시계가 친구들의 시샘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표정은 불안하다. 곧 심리상담센터 안내 멘트를 통해 그의 위태로움이 드러난다. 전화를 끊은 하오펑이 테라스
검정 화면, 타닥이는 소리, 그 위의 흰 글씨. 영화의 오프닝이자 이야기 전개의 중심을 맡고 있는, 다소 난잡하게 편집된 화면들. 이와이 슌지의 은 가수 ‘릴리 슈슈’의 팬사이트인 ‘릴리 필리어’ 속 유저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이치하라 하야토 (하스미 유이치 役) 는 ‘릴리 필리어’의 운영자, ‘필리어’이다. 그는 릴리 슈슈의 노래들로 위로를 받고, 아픔을 견디어 낸다. 물론, 현실에서 유이치가 필리어라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유이치가 릴리 슈슈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오시나리 슈고
를 통해 아름다운 작별의 시간을 연출했던 네오 소라 감독이, 이번엔 극영화 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음악을 통해 분열된 사회를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를 펼친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는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불합리, 차별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어, 곧 마주하게될 미래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그가 이런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달려 들겠다는 의지를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드러난다. 암전 직후, 강렬한 음악과 함께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내 틸트다운으로서 추락의 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는, 그의 주요작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정식 개봉되지 않은 작품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OTT/IPTV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DVD도 없으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조차 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물론 일본판이나 해외판 DVD 및 블루레이는 존재한다. 다만 한국어 정식 자막은 없다. 애초에 한국에 수입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는 유달리 한국에서 왜 이런 홀대를 당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일본 영화감독'이라면 몇 손가락에 꼽히는 고레에다 히로
일본 영화 특유의 정적이고 섬세한 감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 중심에는 빔 벤더스 감독과 야쿠쇼 코지가 만난 영화, 가 있다. 반복되는 일상의 틈에서 조용히 충만함을 발견하게 하는 이 작품은, 단순한 휴먼 드라마를 넘어 '완벽한 하루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는 한 인물의 일상을 담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충만한 하루를 살아간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고, 그 과정에서 본인이 정해둔 루틴을 차례대로 실행한다. 공공시설 청소부의 직업을 가졌지만, 자부심을 갖고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돌아왔다. 대표작인 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그가, 이번엔 무려 두 편의 장편 영화 과 를 들고 복귀했다. 비록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초청되지 않았지만, 45분 분량의 중편 영화 까지 포함하면 한 해에 세 작품을 선보인 셈이다. 이에 필자는 구로사와 감독의 신작 을 관람하며 GV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먼저 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 작품은 감독이 자신이 연출한 동명의 1998년 작품을 리메이크한 독특한 영화다. 당시 아이카와
2023년 12월 25일 개봉한 타갈로그 영화 는 관객들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로드릭 카바리도의 섬세한 연출과 피올로 파스쿠알의 뛰어난 연기가 어우러져 한 편의 역사적 판타지 스릴러를 완성했다.영화 는 1800년대 필리핀 산 니콜라스, 팜팡가 지역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피올로 파스쿠알이 연기한 조나단 말리아리는 자신의 조상이 머물던 집을 조사하다가, 꿈속에서 귀신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꿈을 통해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되며, 유체이탈을 통해 살인마 신부로 알려진 자신의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