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함과 불완전함 속에서
검정 화면, 타닥이는 소리, 그 위의 흰 글씨. 영화의 오프닝이자 이야기 전개의 중심을 맡고 있는, 다소 난잡하게 편집된 화면들.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은 가수 ‘릴리 슈슈’의 팬사이트인 ‘릴리 필리어’ 속 유저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치하라 하야토 (하스미 유이치 役) 는 ‘릴리 필리어’의 운영자, ‘필리어’이다. 그는 릴리 슈슈의 노래들로 위로를 받고, 아픔을 견디어 낸다. 물론, 현실에서 유이치가 필리어라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유이치가 릴리 슈슈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오시나리 슈고 (호시노 슈스케 役)에게 있다. 모범생인 호시노도 릴리 슈슈의 팬이었는데, 유이치는 호시노와 같은 반, 같은 동아리를 하면서 친해지게 되고, 그를 통해 릴리 슈슈를 알게 된다.
둘은 친한 친구였지만, 여행에서의 위기 때문인지, 가정에서의 문제 때문인지, 여름방학이 지난 시점부터 호시노는 유이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유이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사건은 릴리 슈슈의 콘서트 당일에 발생한다. 유이치는 푸른 사과를 건네받는 순간, ‘릴리 필리어’ 안의 유저인 ‘파란 고양이’가 호시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팬사이트에서 그토록 나를 위해주었던 사람이 현실에서는 나를 괴롭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유이치는 혼란스러운 사람들 틈 속에서 호시노를 죽이게 된다.
감독 이와이 슌지는 자신의 유작을 고르라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나 또한 이와이 슌지를 생각하면 <러브레터>보다도 이 작품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긴 후유증이 남는 영화이지만, 그만큼 잊지 못하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릴리 슈슈에 기대 각자의 에테르를 찾고 싶어 하는 이들의 이야기. 흔들리는 카메라 움직임이 아이들의 불안정함을, 또, 불완전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서로를 돕기에는 너무 여리고, 너무 어렸다. 차마 그들의 선택을 모두 존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졌던 그 많던 우울과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는 아이들의 작은 용기를 응원한다. 그들이 서로의 치유를 위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에.
희망과 절망 사이의 에테르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치유의 장소가 되었던 ‘릴리 필리어’는 에테르의 요새이다. 영화 속 반복되어 사용되는 단어, 에테르. 에테르는 무엇인가.
영화 속에서는 에테르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래된 빛의 전파를 매개하는 물질로 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고 믿어져 온 물질. 감성의 촉매로,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무언가. 즉, 릴리 슈슈만이 가지고 있는 에테르는 곧 세상을 가드 채운 그들의 이상 (理想) 이었다.
그들에게 릴리 슈슈는 희망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실체 하나 없는 에테르는 아픔을 치유했을지 몰라도, 각자 자신들만의 에테르를 찾지 못한 그들은 이상향에 닿지 못했다. 에테르는 그들에게 살아갈 힘을 줌과 동시에, 도달할 수 없는 이상 세계를 깨달아 포기를 택하게 하는 모순적인 역할을 했다. 에테르를 믿지 않았던 이토 아유미 (쿠노 요코 役)만이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쿠노는 에테르에 기대지 않고 현실과 맞서던 아이였다. 그녀는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을 좋아했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와 쿠노
영화의 시작과 끝을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 장식한다. 오프닝 곡으로 사용된 릴리 슈슈의 아라베스크 (Arabesque, アラベスク)는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으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쿠노가 직접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을 연주하며 영화가 끝난다. 여담으로, 영화 속 선망의 대상으로 나오는 릴리 슈슈의 이름은 드뷔시의 첫 번째 아내였던 릴리 텍시어의 애칭인 릴리와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던 클로드 엠마의 애칭인 슈슈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드뷔시의 흔적이 보인다.
영화의 엔딩 장면, 피아노의 선율은 부드럽고 아름다웠지만, 건반 위 쿠노의 손들은 강인했다. 마치 쿠노가 드뷔시의 에테르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심한 학교폭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버텨 내었던 쿠노. 쿠노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쿠노를 바라보는 유이치.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결심한 유이치 또한 자신만의 에테르를 찾아가기를.
푸른 하늘 위, 연의 자유로움을 동경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한 명 고르자면, 단연 아오이 유우 (츠다 시오리 役) 다. 호시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원조 교제를 강요받았던 츠다는 함께 괴롭힘을 당하던 유이치와의 짧은 만남들을 통해서 릴리 슈슈의 존재를 알게 된다. 츠다 또한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녀가 가고 싶었던 이상 세계를 떠올린다.
힘든 상황의 연속 속에서도 옅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츠다였기에, 그녀의 죽음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츠다. 연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 하늘을 날고 싶다는 츠다의 말. 그리고, 그녀의 죽음. 하이앵글 롱 쇼트로 시작해 점점 줌 인되며 보이는 츠다의 마지막 모습은 미어지도록 서글펐다.
츠다는 죽음으로서 자유로움을 맞이했다. 영화 속, 릴리 슈슈의 노래인 날 수 없는 날개 (Tobenai Tsubasa, 飛べない翼) 가 잔잔히 깔린다. 츠다는 푸른 하늘 위의 연을 동경했다.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밤이다. 연이 영원히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도록.
릴리 슈슈와 슈게이징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나타난 릴리 슈슈의 음악들은 영화를 한층 더 예술적으로 만들었음을 확신한다. 음악의 장르는 Shoe 와 Gazing, 이 두 단어를 합한 슈게이징. 기타의 이펙터를 통해 음악에 큰 노이즈를 섞는 슈게이징은 이펙터의 페달을 밟기 위해 아래를 응시하는 모습이 마치 연주하며 발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가사가 온전히 들리지 않고, 기타 소리와 같은 노이즈가 진동을 통해 들려온다. 한국 인디밴드인 파란 노을의 앨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또한 슈게이징 장르의 음악으로,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나온 릴리 슈슈의 노래, 글라이드 (Glide, グライド) 가 바로 슈게이징 음악이다. 해방감, 자유로움, 어쩌면 공허함이 느껴지는 음악의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유이치가 서 있다. 더 이상 희미하지 않은 가사들이 호흡을 타고 들어온다. I wanna be, I wanna be. 다시 살아갈 유이치는, 비로소 내일을 꿈꾼다. 그 순간 관객인 우리 역시, 각자의 에테르를 찾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객원 에디터 조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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