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비추는 '각색'이라는 거울이 어떻게 망가졌는가
모든 위대한 각색은 원작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때로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고, 때로는 빛을 굴절시켜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그 거울은 산산조각 나 원작의 형상을 기괴하게 왜곡한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은 안타깝게도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수백만 독자를 열광시킨 신화적 웹소설의 영상화라는 기대감 속에서 탄생한 이 영화는, 상업적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한 나머지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망각한 비극적 결과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전독시>는 원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실패이며, 그 결과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배반한 공허한 블록버스터로 전락했다. 영화는 원작의 주제와 철학을 제거한 뒤, 그 자리를 감정적 연대라는 보편적 주제로 교체했다. 이 글은 영화 <전독시>가 저지른 치명적인 각색의 오류들을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자본의 논리 앞에 침몰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독자의 죽음: 당신이 아는 '김독자'는 여기에 없다
각색의 성패는 원작의 핵심 캐릭터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구현했는가에 달려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실패는 주인공 '김독자'의 본질을 완벽히 오해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원작의 '읽는 자' 김독자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익숙하지만 몰개성적인 '히어로' 김독자를 세워두었다.
원작의 김독자는 '읽기' 행위의 화신이다. 그의 권능은 초인적 신체 능력이 아닌, '미래를 알고 있다'는 텍스트와 서사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서 나온다. 그는 창조자가 아닌 해석가이자, 전사가 아닌 전략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제4의 벽' 뒤에서 세계를 '소설'로 인식하며 등장인물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는 점이다. 이처럼 원작의 김독자는 단순한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와 독자의 관계'라는 작품의 거대 주제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나 스크린 속 김독자는 이 모든 특성을 거세당했다. 영화는 원작의 지적이고 냉소적인 전략가를, 어리숙하고 감정적이며 상황에 휩쓸리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재정의한다. 이는 관객이 감정적으로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영웅 성장 서사라는, 가장 대중적이고 검증된 흥행 공식을 따르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전독시>의 경우, 이 선택은 작품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오판이다. 그의 본질은 평범한 직장인이었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평범한 직장인이 세상의 유일한 '독자'였기에 특별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 김독자는 원작의 이름을 빌려왔을 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서사의 실종: '이야기'는 어떻게 '연대'라는 가치로 대체됐나
캐릭터의 영혼을 제거한 영화의 칼날은 곧장 서사의 심장으로 향한다. 영화의 두 번째 비극은 원작의 가장 위대한 철학, 즉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훨씬 안전하고 보편적이지만 평범한 '연대'라는 가치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원작의 세계는 '설화라는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설화는 존재의 근원이자 정체성의 증명이며,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이다. 모든 인물은 자신만의 설화를 쌓기 위해 투쟁하고, 그 설화의 무게가 곧 그들의 힘과 위상을 결정한다. 이는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존재하고, 구원받는가'에 대한 장대한 철학적 탐구였다.
그러나 이토록 복잡하고 지적인 메타 서사는 2시간의 상업 영화에 담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제작진은 이 거대한 철학적 기둥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설명하기 쉽고, 감성적으로 호소하기 용이하며, 대중적으로 검증된 '연대'라는 주제를 이식했다. 주제의 치환은 원작이 가진 거의 모든 의미를 증발시켰다. '설화'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인물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이야기'가 아닌, 눈앞의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는 평면적인 게임 캐릭터처럼 변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구원'이라는 숭고한 목표가 '동료를 지키는 것'이라는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되면서, 작품의 격은 현저히 낮아졌다.
블록버스터의 함정: 스펙터클은 어떻게 서사를 잠식했나
앞선 두 가지 실패는 결국 '블록버스터의 함정'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된다.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을 매혹시키기 위해 선택한 화려한 스펙터클과 빠른 속도감에 스스로 발목을 잡혔다. 원작의 매력 중 하나는 시나리오 속에서도 인물들이 숨을 고르고 전략을 짜는 '밀도 높은 여백'에 있었지만,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관객을 쉴 틈 없이 다음 시나리오로 몰아붙인다.
이러한 속도전은 원작 팬조차 따라가기 벅차게 만들며, 개연성의 구멍을 수없이 노출한다. 결국 영화는 '이 사건 이후 저 사건이 일어났다'라는 사실의 나열만 남았을 뿐, '왜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는가'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했다. 또한, 원작의 지적인 투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어려운 길 대신, 주인공에게 칼을 쥐여주고 괴물과 싸우게 하는 쉽고 직관적인 길을 택했다. 시각적 쾌락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의 밀도는 가장 옅어진다. 스펙터클은 서사의 공백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가 되었고, 현란한 볼거리는 오히려 작품의 지적 깊이를 얕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 <전독시>는 원작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보려 했지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해버린 비운의 작품이다. '올바른 각색'이 원작의 영혼을 계승하여 새로운 육체에 담아내는 것이라면, 영화 <전독시>는 원작의 영혼을 박제하여 화려한 상자 안에 담아 전시하는 것에 그쳤다. 이 실패는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넘어, 거대한 'IP 유니버스' 시대를 맞이한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올바른 각색’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전독시>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하고도 처절한 교훈이다. [객원 에디터 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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