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왜 버려졌는지에 대해 앞뒤 설명 없이 영화가 시작된다. 소년 시릴이 전화기 너머 애타게 찾는 대상은 아버지다. 보육원 직원의 만류에도 시릴은 집요하게 수화기를 붙잡는다. 11살 소년에게 영문 모를 아버지와의 단절은 이해되지도 않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시릴의 무모하고 맹렬한 기세를 꺾은 건 수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다.“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아빠는 떠나셨대. 받아들여”“자전거는 어쩌고요?”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기고 자전거도 잃어버렸다. 이제 아버지와 살면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소년의 세계는 붕괴되었다. 소년은 무
세상에 단 한 번만 존재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지우며 예술의 근간으로 스며드는 순간일 것이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바로 그 찰나를 붙잡는다. 가부키의 화려한 장막 뒤, 한 인간의 피와 숨결로 예술이 빚어지는 잔혹한 과정을 응시한다. 영화가 응시하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다. 인간이 단 하나의 경지를 얻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끌고 가는지에 관한 잔혹한 예술의 계보학이다.는 가부키의 ‘온나가타’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배우 키쿠오의 삶을 조명한다. 키쿠오는 야쿠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 이 명제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을 진리처럼 믿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 영화는 의문 섞인 물음을 던지며 시작한다.고통이 온전히 나만의 몫으로 남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례식 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기대며 고통을 잠시 덜어내곤 한다. 그러나 조문객들은 결국 떠나는 존재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면, 잠시 가려졌던 고통은 다시 온전히 나에게 돌아온다. 홀로 맞는 집의 적막함과 공허함. 그 고통스러운 순간은 누구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오직 내가
은 윤가은 감독의 신작으로, 현재 많은 영화 팬들에게 호평을 얻고 있다. 영화는 ‘주인’이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진실한 삶, 삶의 주도권, 그리고 용기와 회복이라는 주제를 담담하게 펼쳐낸다. 활기차고 털털한 성격의 여고생인 주인은 또래들 사이에서 흔히 말하는 ‘인싸’의 삶을 살고 있다.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 연애, 가족 관계까지 평범하면서도 밝은 일상을 보이는 듯하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숨겨진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삶과 관계는 순식간에 요동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진실과
좋은데 피곤한 우리네 멜로언제부턴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일 자체가 피곤하다는 걸 누구나 쉽게 인정하게 됐다. 마음엔 여유가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며, 인간관계는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교류에는 품이 든다. 진심을 요하는 공감과 소통은 더더욱 그렇다.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을수록 관계는 사치가 된다. ‘내가 지금 누굴 만날 땐가?’ 하는 자기 검열이 일상이 된다.사람 만나는 일이 어디 쉽나. 연애고 썸이고 다 좋은 거 알겠는데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 피곤한데. 애쓸 일이 너무나 많다. 어쩌면 영화·드라마보다 절절한 것이 현실이겠다.
“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변성현 감독의 는 허구의 인물 트루먼 셰이디의 이 명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 속 누구나 알다시피, 트루먼 셰이디는 변성현이 창조한 가짜 인물, 그리고 또 한 번 그가 만들어낸 가짜 인물 ‘아무개’(설경구)의 상상 속 존재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소개하는 남자가 만든, “아무것도 아닌 남자”인 셈이다. 메인 랩컨 관제사로 임명된 이례적인 한국인 고명(홍경)은 진실보다 보이는 것을 믿는 사회 속에서 약삭빠른 생존의 방식을 터득한 인물이다
| 다시 군복을 입고, 는 무엇을 ‘보는가’폭력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 나체로 자유를 선언한 , 그리고 과거의 망령을 소환한 을 지나 도달한 는 ‘시선의 영화’다. 다시 군복을 입은 군국주의는 ‘포로수용소’라는 거대한 제국의 밀실 속에 갇혀,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낸다. 이 지점에서 속 사다와 키치조가 국가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숨어든 방은 ‘밀실 속의 밀실’로 읽힌다. 일반적으로 는 오시마 나기사의 필모그래피 중
은 애도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다. 이 작품의 슬픔은 소리와 리듬으로 이루어진다. 탭댄스의 특유의 박자감, 메트로놈의 일정한 소리, 인물의 심리를 반영한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의 핸드헬드 움직임, 그리고 고요한 음향 디자인까지. 영화는 감정의 격렬함 대신 그 진폭을 탭댄스이라는 물리적 움직임으로 대체한다. 그 결과, 울음은 더 이상 목소리가 아니게 된다.지애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탭댄스를 춘다. 발끝이 흙을 때릴 때마다, 그 리듬은 마치 통곡의 리듬처럼 들린다. 톡톡 울려 나오는 소리는 울음의
은 한 청춘의 고립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그것은 흔한 의미의 외로움이 아니다. 영화는 말로 규정되지 않는 감정의 층위를 음악, 공간, 그리고 ‘소리의 부재’로 형상화한다. 청춘의 외로움이 종종 관계의 단절이나 죽음의 충격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모든 감정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바로 그 절제와 여백이 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든다.영화의 중심에는 작곡 전공생 지안이 있다. 지안은 졸업 공연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친구 하나의 방이 있는 하숙집과 남자친구와 함께 쓰는 연습실을 맴돌며 곡의 가사
영화의 주제는 ‘실연’이다. 실연을 통해 인간관계의 끊고 맺음을 돌아본다. 흔히 실연을 ‘사랑의 실패’나 ‘연애의 실패’로만 규정하지만, 이 영화는 보다 넓은 시선에서 관계의 단절과 회복 과정을 탐구한다. 중심 감정은 단연 사랑이다. 영화는 실연을 겪은 사람들의 아픔과 미련, 그리고 순응과 새로운 시작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비춘다. 제목처럼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조찬모임’을 마련해 위로를 건네려 하지만, 사랑의 상실에서 오는 고통은 제3자의 위로로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결국 그 모임은 실연을 기념하며 극복하려는 의식이지만, 정
자극적인 제목과 배우 하윤경의 등장만으로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런데 2021년 공개작이지만 2025년 지금 보면 반가운 얼굴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방효린. 초반부에 왠지 모를 익숙한 얼굴에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저 ㄴ을 어떻게 죽이지’는 그녀에게 첫 연기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연기력으로 믿고 보는 두 주연 배우와 감독의 정교한 미장센, 중간중간 던지는 유머 포인트까지. 28분이라는 러닝타임 속에서 이 영화는 다섯 인물의 각기 다른 욕망을 깔끔하게 잘 녹
블랙아웃된 화면 위로 띄워지는 알 수 없는 내레이션과 시대극에 어울릴 법한 웅장한 사운드트랙. 는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아 거대한 세계 안으로 뛰어든다. 영화는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학교에선 다인종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스킨헤드를 한 여학생과 치마를 입은 남학생이 공존하는 생경한 풍경이 보인다. 경찰이 클럽에서 소란을 일으킨 학생들의 얼굴을 찍자 그들의 신상이 모두 공개된다. 나이, 학교, 이민자라는 정보까지. 사회에서는 독재에 가까운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학교는 학생들을 ‘효율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우리가 괴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응시하는 영화다. 그는 진실을 밝혀내기보다, 시선이 어떻게 현실을 오염시키고, 오해가 어떻게 존재를 재구성하는지, 그 위험한 인식의 메커니즘을 세 개의 막으로 가만히 펼쳐 보인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지목하거나 누군가를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 쪽으로 되돌리는 가장 고요한 형태의 윤리적 고발이다. 〈괴물〉은 결국, 괴물을 찾아내는 영화가 아니라 괴물이 생겨나는 사회의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총 1567일. 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영화 는 전쟁의 마지막 5일을 주 무대로 택했다. 1567일에 견주었을 때 약 0.32%에 속하는 아주 자그마한 기간, 이 영화에서 그 시작을 알리는 11월 7일은 독일 전사자들의 인식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고지된다. “어제가 생일이었군.” 11월 6일생 전사자를 두고 말하는 어느 군인의 목소리를 통해서다. 주인공 파울(필릭스 캐머러)의 경우 생일을 정확히 일주일 앞둔 11월 11일, 불과 몇 초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외설과 예술의 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감독 ‘오시마 나기사’의 세계가 특히 그러하다. 오시마 나기사는 세 작품 - , , 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함과 그것이 개인의 몸에 각인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실험했다. 세 영화는 각각 다큐멘터리, 포르노그라피, 공포·멜로라는 전혀 다른 장르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일본 근대가 구축한 제국의 욕망에 대한 비판을 밑바탕으로 둔다.| 적극적 개입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현재 영화계에서 가장 뜨겁고 주목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독창성과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독창성이 강한 그에게 대중성을 허락할 작품이 될 것이다. 자신이 영화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하면서, 관객이 원하는 지점까지 함께 짚어낸다. 우선. 그가 가진 특유의 연출, 감각은 여전히 유지된다. 거기에 다양한 장르가 혼합되었는데, 이는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액션, 드라마, 블랙 코미디 등의 장르적인
지금은 보기 힘든 단관극장은 동네마다 있던 유일한 영화로의 창구였다. 단관극장들을 떠올리면 무대가 딸린 큰 스크린과 제대로 보수가 되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복도, 딱딱하고 눅눅한 객석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에서 한 영화를 몇 번에 걸쳐 상영하던 그 극장도 바로 단관극장이다. 멀티플렉스라 불리는 지금의 영화관보다 편안함은 덜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기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다. 영화에 비치는 대부분의 피사체는 사라져가는 존재에 가깝다. 빛바랜 과거의 무협 영화와 그 영화 속 사람들, 엇갈림의 연
기록될 만한 전폭적인 자본을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는 ‘작가’ 폴 토머스 앤더슨의 색채를 잃지 않았다. 끈질긴 캐릭터 연구, 고유한 편집 리듬, 리드미컬한 음악 등 앤더슨 영화에 기대하는 요소들이 온전히 담겼다. 더 고무적인 건 앤더슨의 ‘새로운’ 영화라는 확장적 감상까지 (이번에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인데, 장르를 융합하는 솜씨가 무엇보다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집요한 추적과 그에 따른 전략 공방에서 우러나오는 서부극적 서스펜스, 혹은 부조리한 상황을 비트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엉뚱한 유머. 영화 독해 수준을
영화의 첫 장면이 스크린에 비치는 순간, 우리는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평면적이고, 단순한 앵글 속 흔하지 않은 색감은 관객들의 눈과 뇌를 동시에 사로잡는다. 자신만의 미학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영하는 감독, ‘웨스 앤더슨’. 그의 대표작으로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있다.웨스 앤더슨의 미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단편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외일 것이다.그가 영화를 처음 시작한 때는 1994년 단편 ⌜바틀 로켓⌟ 으로 시작했고 2014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에도 꾸준히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은 안톤 체홉을 연상시킨다. 초기작부터 보인 연극적 요소와 더불어 에서 보인 「바냐 아저씨」가 뇌리에 박힌 것 같다. 특히나 의 배경이 되는 숲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이를 배가 시킨다.「바냐 아저씨」에서 아스트로프는 숲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현재 무차별적인 개발로 인해 숲이 파괴되고 있음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체홉 본인을 투영한 캐릭터인 아스트로프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한 대목이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