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된 화면 위로 띄워지는 알 수 없는 내레이션과 시대극에 어울릴 법한 웅장한 사운드트랙. <해피엔드>는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아 거대한 세계 안으로 뛰어든다. 영화는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학교에선 다인종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스킨헤드를 한 여학생과 치마를 입은 남학생이 공존하는 생경한 풍경이 보인다. 경찰이 클럽에서 소란을 일으킨 학생들의 얼굴을 찍자 그들의 신상이 모두 공개된다. 나이, 학교, 이민자라는 정보까지. 사회에서는 독재에 가까운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학교는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라는 명목으로 온 사방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근미래의 일본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대지진이라는 큰 불안을 떠안고 살아간다.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야금야금 발전했고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빠져들고 있었다.
두 세계의 충돌
<해피엔드>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일본 사회’라는 큰 세계와 ‘학교’라는 작은 세계다. 이 각각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다. 사회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정권에 투쟁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감시 카메라를 없애기 위해 항의한다. 두 세계 모두 불합리한 기득권에 반대한다. 반대로 두 세계를 이루는 사람들도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세상을 개혁하자고 목소리를 내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를 받아들이거나 남일로 치부하며 각자의 몫만을 사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전자는 코우이고 후자는 유타의 모습이다.
코우와 유타는 함께 세계를 돌며 음악을 만드는 디제이를 꿈꾸던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어느 날부터 둘의 우정에는 점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코우는 우연한 계기로 반정권 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행동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이 없는 세상에 목소리를 내게 된다. 동시에 코우는 침몰해 가는 사회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한량처럼 살아가는 유타를 비난한다. “너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도 없는 거지?” 이에 유타는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즐길 뿐이라며 반발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냐는 것이다. 코우가 ‘영원히 친구랑 즐거울 것 같냐’고 묻자, 유타는 ‘길에서 소리 지르면 세상이 변하냐’고 되묻는다. 이것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의 간극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대입하면 그 역할은 반대가 된다. 음악 동아리에서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 의지하던 어느 날, 코우와 유타는 무료함을 달래려 장난을 도모한다. 바로 평소 마음에 안 들었던 교장선생님의 새 차를 세로로 세우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을 향한 비밀스러운 시위 같기도 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교장은 학생들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사방에 설치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해 그들에게 불리한 벌을 준다. 학생들은 자유를 되찾기 위해 교장실을 점거해 시위하지만, 교장은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이에 유타는 직접 단상에 올라가 자신이 했다며 자백하고, 그때 함께 있었던 코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야 하고, 대학에 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던 코우는 잠잠하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즐기는 게 최고라던 유타는 졸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벌을 받는다. 그만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역전된 코우와 유타의 관계성은 과연 무엇이 세계를 지키는 행위인지 반문한다. 희생으로 학교를 바꾼 건 결국 사회를 위해 시위를 하던 코우가 아닌, 그가 무의미하게 살지 말라고 비판했던 유타였다.
지진과 청춘
<해피엔드>는 사회를 향한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청춘 영화’로서의 가치에 있다. 오프닝 타이틀 이후 클럽에서 경찰을 피해 도망치던 학생들의 움직임이 멈추는 장면은, 빠르게 흘러가는 청춘을 잠시 정지시킨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그렇게 지나가버릴 시절의 불안과 해방감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붙잡는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미성숙하고 가능성으로 가득한 인물들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긴장감과 동시에 학창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게 되는 묘한 감정이 공존한다. 결국 <해피엔드>의 본질은 가치관의 충돌을 겪으며 성장하는 청춘의 초상에 있다.
사실 청춘을 다루는 성장 영화의 대부분은 그리 특별한 서사를 갖지 않는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우정을 방해하는 요소가 등장하고, 결론적으로 희생함으로써 그 우정을 지키거나, 반대로 다른 목표를 위해 우정을 희생하는 경우다. 그리고 그 우정을 방해하는 요소에 대해 우리는 공통의 불안감을 공유한다. 친구들이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그 작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불안감은 학창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법한 것이기 때문에 기저에서 우리의 불편한 마음을 자극한다. <해피엔드>의 불안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큰 범위에서 일본 사회 전체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언젠가 다가올 100년 주기의 대지진. 두 번째는 소멸해 가는 청춘, 다시 말해 그들이 언젠가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물을 통과 의례처럼 필연적으로 두 가지의 진동을 겪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지진과 청춘은 서로 다른 속도로 인물들을 통과하지만 비슷한 잔해를 남긴다. 청춘을 지나는 인물들은 그것이 진동인 줄도 모르고 그 진동을 겪는다. 그것이 언젠가 끝날 것을 알지만, 정말 모르는 것처럼 기꺼이 함께 흔들린다. 이 예고된 개인적 재앙에는 대비하거나 피하는 방법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지진은 이를테면 사회 전체에 퍼진 불안이다. 언젠가 분명 다가올 것을 알지만 그것이 지나기 전에는 어떤 잔해를 남길지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대비를 한다. 건물에는 내진설계를 하고 사람들은 어디로 대피해야 할지를 배운다. 때문에 사회의 불안을 컨트롤한다는 명목으로 지진의 불안은 ‘정치화’된다. 정치는 사람들의 불안을 갖고 장난감 만지듯 그들을 조종하기에 이른다. 일종의 ‘정치적’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 <해피엔드>에 현실의 일본 사회가 공유하는 공통의 불안감인 지진을 가져온 건 단순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치화된 지진이 점차 사회를 움켜쥐자 결국 억압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존재들이 있다. 청춘으로 대표되는 존재들은 기존 체제에서 (자발적으로) 탈락되어 나오거나 튀어나올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존재다. 중반부 한 차례의 지진이 일어나고 코우가 정치적 인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도 바로 지진과 청춘이라는 인과관계의 파생이다.
정지시키고픈 청춘의 단면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코우와 유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폐건물에서 친구들끼리 디제잉을 하는 장면에서다. 코우는 할 일이 있다며 시위를 위해 먼저 자리를 벗어나려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냐”라는 유타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격분한다. “세상에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들이 있는데, 그것을 왜 보지 못하는 거야”라면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유타와 코우는 멀어진다. 하지만 결국 유타는 그들의 장난이 불러온 모든 책임을 떠안아 감시 카메라를 없애고 코우가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런 유타의 행동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다. 코우가 차별을 없애고 사회의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시위를 했다면, 유타는 자기 존재를 보존해 주던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것이다. 그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해피엔드>는 성장 서사를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같은 일본 영화인 <키즈리턴>을 떠오르게 했고, 우정과 분열 같은 친구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파수꾼>을 연상시켰다. 모든 청춘 영화에는 성장을 방해하는, 혹은 반대로 인물을 성장으로 떠미는 일종의 불안감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키즈 리턴>에서는 미완성인 존재를 세상으로 재촉하는 현실이었고, <파수꾼>에서는 계속 가면을 써야 하는 동등하지 않은 친구 관계였다. 그리고 <해피엔드>는 ‘지진’을 등장시킨다. 자연적이고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지진이라는 재앙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마치 장학금과 대학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단상에 나서지 못했던 코우의 감정과도 같다. 지진이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순간 코우의 마음속에는 큰 진동이 일었음이 틀림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럼 혹은 한계에 대한 무력감. 그것은 성장 단계에 있는 청춘이 느끼는 감정을 대변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금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을 재촉하는 그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뭉치고, 몰래 음악을 틀고, 옥상에서 세상을 바라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교장의 차를 거꾸로 세웠다. 세상을 방황하는 그런 불안정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는 점에서 해피엔드는 훌륭한 성장 영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
앞서 이 영화의 중요한 정지 장면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오프닝에 더해 또 하나의 정지 장면은 바로 엔딩이다. 수미상관 구조를 취하는 듯, 코우와 유타는 육교 위에서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이 장면의 의미는 조금 색다르게 다가온다. 오프닝 장면이 관객을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면, 엔딩 장면은 온전히 코우와 유타를 위한 장면이다. 그들에게 한 시절이 지났음을,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그것을 붙들어보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체된 성장이라는 아이러니
청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성장 서사이고, 사실 모든 좋은 영화는 훌륭한 성장 서사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그것이 실패한 성장일지라도 말이다. 훌륭한 성장 서사는 불화에 대한 정복이나 합일이 아니라, 되려 불화와의 타협과 화해에서 온다. 이 ‘반성장적 성장’이라는 이 모순은 타자를 타자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자아를 확인한다. 냉소로 바라보던 세상의 앞에 외롭게 서서 그것의 힘에 무력감을 느끼고 절망하고 나서야 성인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장 서사가 집중하는 것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나 ‘무엇을 성공했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남았는가?’에 가깝다. 교장으로 대표되는 불합리한 권력 앞에서 발버둥 치던 코우와 유타의 일탈은 결국 그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았을지 모르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 이후에 계속되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고, 최종의 ‘정지’ 이후에도 이어질 무언가가 (코우와 유타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은 탁월하게 슬프고 씁쓸할지라도, 평탄하지 않고 울퉁불퉁 깎인 상태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지진이 사물의 위치를 바꿔놓듯 그들의 청춘에서 무언가를 바꿔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고, 성장의 통증일 것이다. [객원 에디터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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