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
가녀린 무용수가 날갯짓하고, 백조에 매료된 왕자의 애타는 구애가 포개진다. 파란 조명 아래 펼쳐지는 백조의 호수(Swan Lake)의 일반적인 이미지다. 자유를 동경하는 왕자 '지그프리트'는 성년식 무도회에서 왕비가 될 여자를 택해야 했지만, 백조를 사냥하기 위해 화살을 들고 숲으로 향한다. 호숫가에서 백조가 인간 '오데트'로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녀가 악마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있으며 진실한 사랑만이 그녀를 해방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왕자는 그녀에게 청혼하고 다음날 무도회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악마의 계략으로 악마의 딸 '오딜(흑조)'을 오데트로 착각하여 공개 청혼한다. 결말은 두 버전으로 나뉜다. 크게 상심한 오데트가 자살하고, 왕자도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새드엔딩이 일반적이다. 다른 결말은 왕자가 악마를 물리치고 오데트를 저주에서 해방시키는 해피엔딩이다. 이것이 국립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 파리오페라 발레단, 영국 로열 발레단 등 국내외 저명한 발레단에서 선보이는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의 내러티브다.
수컷 백조들의 군무(群舞)
그리고 여기, 결코 가녀리지 않은 백조들이 등장한다. ‘무용계의 피카소’로 불리는 안무가 ‘매튜 본’은 뮤지컬과 무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2000)>의 엔딩을 장식했던 그 작품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는 ‘공주 구하기 서사(Rescue the Princess Narrative)’의 액티브 남성 구도를 탈피한다. 어머니의 남성편력으로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왕자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지만, 그녀가 돈을 노리고 계산적으로 접근했음을 알게 된다. 충격과 외로움, 그리고 왕실의 억압과 정체성의 혼란까지 겹쳐 견딜 수 없는 절망의 무게를 안게 된 그는 숲속 호숫가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용병 같은 강인한 모습의 남성 백조(리더 백조)가 등장하여 왕자를 다른 백조 무리로부터 보호하고 위로한다. 이후 무도회에서 리더 백조를 닮은 ‘낯선 백조’가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자, 왕자는 질투로 어머니를 폭행하고 정신병원에 구금된다. 누워있는 왕자를 향해 백조 떼가 모여들어 위협하고, 리더 백조는 왕자를 구하다 죽는다. 왕자 역시 백조를 따라 자살하고, 뒤늦게 방으로 돌아온 여왕은 후회와 자책의 눈물을 흘린다.
국민은 게이, 영토는 호수, 주권은 마음껏 사랑할 권리
왕자가 백조를 만나는 숲속 호숫가는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환영의 공간’이며 그곳으로의 도피는 ‘억압된 욕망과 외면했던 정체성을 조우하는 심리적 탈출’이다. 매튜 본의 호숫가는 초현실적인 낙원의 이미지로 점철된 프로방스의 생크루아 호수와 닮았다. 그리고 왕자를 감싸는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날개의 비상(飛上)은 ‘프랑크’(피에르 델라돈챔프스)와 ‘미셸’(크리스토프 파우)이 수영하는 팔의 움직임으로 연결된다. 암컷 백조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관습을 이어받은 듯, <호수의 이방인>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 지나 도착하는 <미세리코르디아(2025)>의 시골마을처럼, 알랭 기로디의 영화에서 도심을 벗어난 로케이션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비단 알랭 기로디가 유년 시절을 시골마을에서 보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호수의 이방인>의 서사가 구현되는 장소는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시키는 양상의 일환이다. 정적이고 신비로운 외딴 호숫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는 게이들로 붐빈다. 비주류들의 모임. 그들이 밀실이 아니라 개방된 호수에서 서로를 탐닉하고 축축한 숲에서 사랑을 나누는 방식은 주류문화 아래 하위문화(게이 사회)가 존재하는 위계구조를 부수고, ‘절대적인 그들만의 사회’를 구축함을 표상한다.
프랑크와 그의 말동무 ‘앙리(파트리크 다삼카오)’가 시내에서 저녁 약속을 잡거나, 앙리가 그를 기다렸다는 등의 단서가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카메라는 호숫가를 제외한 신들은 모두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다. 다시 말하겠다. 그들의 세계는 독립된 국가다. 나체로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에덴동산과 상당히 유사한 국가. 다소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국가의 성립요건은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이다. 이 에덴동산의 성립요건은 게이 국민일 것, 호수와 숲을 영토로 할 것, 마음껏 탐닉하고 유혹하고 사랑을 나눌 권리다.
기존 국가의 법을 초월하는 그들의 동산은 후반부, 프랑크를 날카롭게 심문하는 ‘형사’(제롬 샤파트)’의 “당신들이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외부에서는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세계로 비친다. 그러나 벗은 몸을 보고 민망함을 느낀다거나 난무하는 섹스 씬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그것은 우리야말로 에덴동산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인류의 첫 살인 서사에 더하다: 목격자 ‘프랑크’
에덴동산을 전제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미셸이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다 머리를 눌러 전 애인을 익사시키고 돌아오는 롱테이크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의 첫 살인자 카인이 떠오른다. 카인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로,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재물만 받고 자신의 재물은 받지 않자 질투심에 아벨을 살해한다. 미셸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는 앙리를 따라가 숲속에서 그를 살해한다. 일전에 그는 ‘앙리’에게 프랑크와 잠자리를 한 적이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카인은 하나님의 땅에서 추방되어 유리하는 벌을 받았다. 다만 창세기 서사에 ‘목격자’는 없다. 전례 없는 목격자 ‘프랑크’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사랑이란 상체와 하체가 같이 그려지는 섹스와 정액의 이미지로 구현되어야 한다. 영화를 찍거나 볼 때 가장 아쉬운 점도 이렇게 중요한 사랑의 과정을 기껏해야 5초쯤 보여주거나 지워버리는 것이다.’ -2022 부산국제영화제, 알랭 기로디
다른 영화에서 충분히 할당되지 못한 섹스 신의 분량을 메꾸듯, <호수의 이방인>에는 남성들의 나체와 성관계가 셀 수 없이 등장한다. 그의 말처럼 섹스는 사랑의 필요조건이고, 우리는 무수한 필요조건들 중 섹스를 배제해왔다. 그러나 알랭 기로디도 ‘섹스가 사랑의 충분조건은 아님’을 알고 있다. ‘프랭크’는 미셸이 전 애인을 살해한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 단순히 육체적 욕망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그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함께 잠을 청하고 싶어 한다. 사적 공간으로의 초대와 일상의 교류를 기대한다. 그러나 미셸은 오로지 육체적 관계만을 탐미한다. 비참한 에로스적 사랑은 알랭 기로디가 목격자를 처벌하는 첫 번째 방식이다.
호숫가에서 오로지 앙리만이 끝까지 옷을 벗지 않는다. 그는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듯 보인다.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 이별한 후, 매일 호숫가에 와 사색하고 이따금 프랑크와 대화하는 것이 그의 여름휴가의 전부다. 프랑크와 대화하는 것이 즐겁고 (프랑크도 그렇게 느낀다.), 그와의 식사를 기다려왔다고 말하지만 육체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필리아적 사랑은 살인자 미셸로부터 프랑크를 구하기 위한 ‘자살적 타살’로 이어지며 아가페적 사랑으로 끝맺는다. 앙리는 ‘네 품에서 죽을 수 있어 좋다’는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이것이 목격자 프랑크가 받은 두 번째 벌이다.
결국 프랑크는 어떠한 사랑도 이루지 못했다. 이 결말을 단지 도덕성을 저버리고 욕망을 택한 남성의 말로라는 단순한 구조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히치콕식 스릴러 요소가 가미된 열린 결말부에서 프랑크가 미셸에 의해 살해당했던 혹은 운 좋게 도망쳤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피의자가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모순이다. 고로 불가항력적으로 미셸을 사랑한 프랑크의 선택에서 도덕과 윤리를 읽어내는 것도 모순이다. 나는 이 환영의 세계에서 죽은 시인의 방식으로 지그프리트 왕자와 호수의 이방인들을 추모한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 것"
-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객원 에디터 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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