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 왕가위. 그의 영화는 살아보지 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겪어보지 않은 사랑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랑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하게 된다.

[중경삼림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중경삼림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외로움의 얼굴

왕가위가 보여주는 사랑은 늘 불안정하다. <중경삼림> 속 금성무(경찰 223 役)는 여자친구와의 이별 후 하룻밤의 짧은 사랑에 몸을 던지고, <화양연화> 속 장만옥(소려진 役)과 양조위(주모운 役)는 부부라는 사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고독에 잠긴다. <해피투게더>의 장국영(보영 役)과 양조위(아휘 役)는 연인으로 함께했지만, 제목과 달리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함께 있으나 외로운 이들, 사랑하지만 고독한 이들이 왕가위 영화의 중심에 있다.

<해피투게더>의 보영과 아휘는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헤어져도 외롭고, 함께여도 외로웠다. 그러나 결국 서로를 찾는다.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그들에게 사랑은 고통이었고, 동시에 버리지 못하는 집착이었다. 보영은 아휘의 구속이 싫어지고, 아휘는 끝없는 불안을 견뎌내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결말은 영원한 이별이지만, 왕가위는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휘는 고독을 배우고, 고독 속에서도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기로 한다. 이는 단순히 파국으로 끝나는 비극이 아니라, 외로움 속에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아비정전 스틸 컷, 사진= 디스테이션]
[아비정전 스틸 컷, 사진= 디스테이션]

그리고 <아비정전>의 장국영(아비 役). 그는 영화 전반을 통해 심연의 고독을 연기한다. 영화 제목 ‘아비정전’은 ‘방황하는 젊은이’를 뜻한다. 영어 제목 Days of Being Wild 역시 그 방황의 시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아비는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랑 앞에서도 방황했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인물이다.

아비는 자신을 다리가 없는 새에 비유한다. “다리가 없는 새가 있었다. 나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날다 지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고, 땅에 닿는 순간은 죽는 순간이었다.” 그의 대사는 인생의 비유이자 운명의 고백이다. 이름 속에 들어 있는 날 비(飛) 자처럼,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날아다니는 새였다.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다 사라지는 존재, 그가 바로 아비다.

[타락천사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타락천사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순간을 붙잡는 기법

왕가위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촬영 기법이 큰 역할을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이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서 특히 부각된 이 기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저속 촬영 후 특정 프레임을 복사해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주인공은 정지한 듯 보이고 배경만 빠르게 흐른다. 시간은 멈춘 듯하면서도 잔상은 또렷하게 남는다. 순간을 붙잡아 영원으로 만드는 장치다.

<중경삼림>에서는 양조위(경찰 663 役)가 커피를 마실 때 왕페이(페이 役)가 그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활용된다. 관객은 짧은 시선을 영원한 기억처럼 받아들인다. <타락천사>에서는 금성무(하지무 役)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흑백 화면 속 스텝 프린팅으로 표현된다. 화면 전체가 사랑의 감각으로 물들어, 다른 요소가 사라진 듯한 인상을 준다.

흥미로운 점은 <타락천사>가 애초에 <중경삼림>의 한 에피소드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이다. 분량 문제로 독립된 작품이 되었지만, 파인애플 통조림이나 Midnight Express 같은 배경과 소품이 그대로 등장한다. 두 영화에는 핸드헬드 촬영도 자주 쓰였는데, 흔들리는 앵글은 인물들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해피투게더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해피투게더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왕가위의 배우들

왕가위의 영화는 배우의 존재가 곧 서사다. 그의 각본은 느슨하고 즉흥적일 때가 많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아우라가 그것을 채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한 작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호흡을 맞춘다. 왕가위에게 배우는 단순한 출연자가 아니라, 작품 세계를 완성하는 페르소나다.

장국영은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에서 위태롭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주었고, 유덕화는 <열혈남아>와 <아비정전>에서 강인한 청춘을 연기했다. 금성무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서 아름다운 고립을 체현했고, 장만옥은 <화양연화>, <아비정전>, <열혈남아>에서 애틋한 잔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양조위는 왕가위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얼굴이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해피투게더>, <2046>까지 그의 대표작에 연이어 출연했다. 양조위는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이중성을 지닌 배우다. 그의 눈빛은 왕가위 영화의 핵심을 담아낸다. <중경삼림>에서 경찰모를 벗고 왕페이에게 다가가는 순간, <해피투게더>에서 녹음기를 들고 오열하던 장면,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을 기다리던 호텔방의 침묵 속 눈빛. 그 모든 것이 영화 속 사랑과 고독, 홍콩 특유의 감성을 압축한다.

[화양연화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화양연화 스틸 컷, 사진 = 디스테이션]

음악이 만든 낭만

왕가위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은 음악이다.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장면과 서사의 일부다.

<화양연화> 전반을 관통하는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Yumeji's Theme’는 담담하지만 설렘을 품은 선율이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우연하고 필연적인 만남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그들의 관계를 하나의 리듬으로 묶는다. 우메바야시는 <2046>에서도 ‘2046 Main Theme’으로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이는 홍콩과 대만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타락천사 스틸 컷, 사진= 디스테이션]
[타락천사 스틸 컷, 사진= 디스테이션]

사운드트랙 또한 각별하다. <타락천사> 엔딩에 흐르는 The Flying Pickets의 ‘Only You’는 질주하는 연인들에게 외로움을 잊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해피투게더>의 엔딩곡 The Turtles의 ‘Happy Together’는 혼자가 된 아휘의 씁쓸한 새 출발을 비춘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중경삼림>의 음악들이다. 왕페이의 ‘몽중인’과 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은 홍콩의 밤거리를 가득 메운다. 음악은 두 주인공의 순정을 투명하게 비추며, 영화가 남긴 여운을 오래도록 지속시킨다.

[중경삼림 스틸 컷, 사진= 디스테이션]
[중경삼림 스틸 컷, 사진= 디스테이션]

사랑으로 잠 못 이루는 거리에서

왕가위의 영화는 외로움과 낭만, 사랑과 방황을 동시에 기록한다. 스텝 프린팅으로 순간을 붙잡고, 배우의 눈빛으로 서사를 완성하며, 음악으로 장면을 확장한다. 그의 영화 속 거리는 늘 사랑으로 잠 못 이루는 공간이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홍콩의 어느 시대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의 쓸쓸함 속에서, 잠 못 이루는 거리 위에서, 왕가위의 영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객원 에디터 조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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