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다음 무대로 나아가며

이 작품은 사랑스럽다. 이게 정말 연기인가 싶을 정도로 찐친 케미를 자랑하는 두 친구 민하와 우연의 모습이 그러하고 그들이 나란히 선 무대에서의 모습 또한 사랑스럽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미래를 향할 친구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 모습이 벅차오르게 사랑스럽다. 처음 한 화면에 함께 잡히는 어리숙한 두 사람의 모습조차도 주인공 민하의 무거운 상황을 잊게 만들 만큼 사랑스러우며 처음 민하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계단 앞에 놓인 빨갛고 파란 소쿠리와 그 안에 말려지고 있는 나물들도, 언젠가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 입었을 원피스와 페도라도 참 예쁘며 두 사람을 한 집에 모이게 만든 문제적 바퀴벌레도 사랑스럽다.

갖고 들어온 짐에 비해 훨씬 더 버거워하는 민하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짊어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주며 작품이 시작된다. 고된 몸을 뉘며 지친 마음에 잠시 휴식을 주려고 하지만 이내 곤한 잠을 깨우는 알람 소리와 눈치 없는 집주인 아저씨의 목소리에 그녀는 또다시 마주하기 힘겨운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된다. 어지러운 방 안, 그녀의 복잡한 심정처럼 옷이며 책이며 집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어지럽혀진 집 안을 정리하다 원피스를 집어 드는 민하. 가만히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대보며 그 안에 담긴 추억을 곱씹는지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다. 저 옷에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럴까. 아련한 심경의 민하의 뒤로 그가 지나간다. 그렇다. 바선생. 그가 나타났다. 다급해진 민하는 이 불청객을 처리해 줄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당근에 남기고 그렇게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우연이 풀아이템을 장착하고 등장한다. 저 사악한 바퀴에게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친구 우연이라는 것을 알게 된 민하는 '왜?'라는 탄식과 함께 나란히 민하의 방으로 입장하게 된다.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내 주변만 봐도 격투계의 거목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 지금 사장님이 되어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축구 유망주였던 사람이 종목과는 전혀 무관한 체육관 관장님이 되어 좋은 아빠, 멋진 남편으로 살고 있으며 누구보다 춤을 사랑하는 댄서였던 동생이 지금은 춤보다 더 사랑하는 아이 둘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 슈퍼우먼이 되어있다. 오랜 기간 그들의 삶을 지켜본 나로서는 감히 타인의 인생을 실패냐 성공이냐를 판단할 자격도 없고 입장도 안 되지만 그들의 삶은 원래 꿈꾸고 있는 모습과 다른 모습이니 감히 그들을 실패한 인생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한때 재능 넘치던 연출가 지망생이었던 지인이 자신의 꿈을 접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며 나에게 ‘도망쳐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난 그렇게 자신의 인생 한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그 친구에게 그런 말을 전했었다. 앞으로 어떠한 미래가 기다릴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라고. 이 모든 것이 우리 인생에서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연출가라는 직업은 마침표일지 아니면 쉼표일지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의 인생은 연출가라는 정체성을 넘어 온전히 그 자신으로 완성해 가는 삶의 일부분이기에 새로운 출발을 앞둔 그에게 당시 저런 말을 전하며 응원을 했었다.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민하 역시도 새로운 출발을 앞둔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새로운 출발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희망, 미래, 꿈과 같은 달콤하고 찬란한 색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그런 말들은 민하가 엉망인 자기 집에서 끄집어낸 원피스에 더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무대로 옮겨진 그녀의 입에선 대사가 아닌듯한 진심이 토해져 나온다. 맞은편에 앉은 우연이라는 배역에게.

우연은 민하에겐 미묘한 상대였다.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게 될. 그래서 그녀의 안부를 묻는 민하에게 스쳐 지나가는 표정이 편하지만은 않다. 둘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은 처음 민하의 집으로 들어올 때 계단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위치 차이에서 오는 눈높이의 차이, 집을 정리하다 대본을 발견했을 때 반응의 차이로 현격하게 보여준다. 누군가에겐 소중한 대본이 누군가에겐 번거로운 짐일 뿐일 테니.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우연도 그런 민하의 마음에 공감하고 만약에……라며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뭐라고 위로를 전할지 몰라 만약에 네가 나비였다면, 내가 아니라 네게 날개가 있었더라면 하고 위안이 될 수 없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지만 너무나 의연해진 민하의 모습에 굳이 더 말을 이어갈 수 없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구보다 민하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얼마나 열심히 고치를 뚫고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했는지,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을 시기를 함께하며 누구보다 똑똑히 목격했을 테니. 차라리 원망과 슬픔이라도 자신에게 뱉어냈으면 좋으련만 우연이란 나비도 마음이 좋지 않지만 그녀에게 우연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앞서 대본을 대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곱게 접어 이삿짐에 소중하게 담는 원피스를 바라보는 민하의 표정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다.

자신의 고치 시절 나비를 꿈 꾸며 머물렀던 그 방을 나서는 민하의 표정이 어둡지 않아 다행이다. 너무나 예쁜 미소를 남기며 그녀는 그녀의 다음 무대를 향해 떠난다. 여기에서 이 무대에서 함께한 시간이 다 했으니 그녀 말대로 그냥 ‘때가 된 것뿐이니’.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무대를 향해 서로를 응원하며 가슴 뭉클한 마지막 커튼콜을 함께 나누고 새롭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각자가 주인공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두 사람의 미래엔 때로는 희극도, 때로는 비극도, 어쩌면 코미디에, 어떨 땐 멜로가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부디 다음 번 무대에서도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두 사람의 공연 끝에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높여 있으니 이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테니. 새롭게 돌아가는 모래시계 속 모래가 다 떨어지면 다시 새롭게 시계가 돌아갈 테니. [기자 유현재]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우리의 연극이 끝나도, 스틸 컷]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