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인 각색이 만들어내는 메시지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캐릭터들의 서사를 엮어내려는 시도를 보인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구현된 정적인 촬영은 마치 <쉰들러 리스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잘 알려진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시 다루는 선택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다. 과연 <하얼빈>은 관객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차분하고 절제된 촬영과 고립된 분위기
홍경표 촬영감독의 솜씨는 <하얼빈>의 시각적 완성도를 이끌었다. 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연출은 작품의 질감과 대비를 부각시키며, 로우키 조명과 미학적인 미술 활용은 각 로케이션에 고립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이러한 촬영 스타일은 영화의 톤을 유지하며, 시대적 비극을 차분하게 그려내는 데 일조한다. 특히 주요 장면에서 사용된 정적인 카메라 연출은 관객에게 고요한 긴장감을 선사하며,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단순한 배경 묘사를 넘어 영화의 테마와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기여한다.
다중 캐릭터 서사의 장단점
영화의 제목이 <하얼빈>인 이유는 안중근 의사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분량은 비교적 공평하게 분배된 듯하지만, 이로 인해 서사가 다소 애매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다양한 캐릭터의 서사를 하나로 엮어내려는 시도는 흥미로웠으나, 일부 인물들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해 관객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특히 특정 배우의 특별출연은 맥락과의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며, 메인 캐릭터들의 서사를 구축할 시간을 희생한 점이 아쉽다. 이러한 구성의 결과로, 몇몇 장면들은 스토리 전개에 필수적이지 않은 느낌을 주어 작품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캐릭터들이 담고 있는 상징성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연기와 캐릭터 해석의 빛과 그림자
조우진은 <하얼빈>에서 기억에 남을 연기를 선보이며,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조우진의 독립군 밀정 연기 덕분에 <하얼빈>이 평면적이지 않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릴리 프랭키가 연기한 이토 히로부미는 분량은 적었지만, 세밀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현빈의 안중근 캐릭터는 엔딩에 다다라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며, 기획 의도에 따라 후반부에 초점을 맞춘 인물로 보인다. 그의 절제된 연기는 초반부의 조용한 존재감을 설명하며, 후반부에 이르러 폭발적인 감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해석은 기획의도가 반영된 부분일 수 있지만, 관객들에게는 다소 느리게 발전하는 캐릭터로 느껴질 수 있다.
창의적인 각색
<하얼빈>는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하며 스펙터클한 요소와 거리를 둔다. 초반부를 제외하면 액션 신은 거의 없으며, 대사의 퀄리티 또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엔딩의 대사는 매우 인상 깊으며, 신파적 요소 없이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기대하지 않았던 창의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조우진의 장면들은 영화의 품질을 대폭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후반부의 전개는 이는 단순히 서사의 반전을 넘어,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구성은 대중적인 요소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영화적 예술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시대극의 한계와 아쉬움
하지만 <하얼빈>은 기존의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이미지와 기법에 많이 기대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밀정>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 시퀀스는 새로움이 부족해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또한, 의도적으로 스펙터클함을 배제하고, 무미건조한 서사와 톤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일부 관객들에게는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 선택은 영화의 주제를 더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보이며, 이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최후반부의 전개는 중후반부까지 무미건조했던 영화의 톤과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긴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로 기억될 것이다.
고요함 속의 메시지
<하얼빈>은 차분한 톤과 절제된 연출을 통해 새로운 시대극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려는 시도는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창의적인 각색과 강렬한 엔딩은 영화의 가치를 더한다. 비록 아쉬움도 남았지만, <하얼빈>은 고요한 서사 속에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는다. 특히 시대적 비극을 담담히 풀어내면서도 그 속에 묵직한 울림과 창의적인 각색을 담아내어 '뻔한 안중근 영화'가 되지 않은 점은 영화의 큰 강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첩자에게도 다음 기회를 주어야 하고, 다 잡은 일본군을 다시 풀어주는 안중근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하얼빈>은 단순히 한 인물의 이야기와 반일적인 감정을 넘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작품이다. [영화감독 김현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