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열의 시대다. 지역감정, 정치적 대립, 이데올로기 갈등 등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골은 너무 깊어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그 사이의 간극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지고, 이제는 단순한 양극화가 아니라 수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파편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진영의 언어와 프레임 속에만 머물며,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결코 한국만의 특수한 현실이 아니다. 세계는 이미 깊은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키예프 루스라는 같은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지만, 지금은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고 있다. 중동의 이라크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갈라져 오랜 세월 피를 흘려왔다. 분열은 국경을 넘어, 종교·민족·계급이라는 다양한 갈래로 확산된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의 유럽에서는 골상학이라는 사이비 학문이 인종 차별을 정당화했고, 그것은 곧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더 이전에는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 채 노예로 팔려갔고, 10세기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유럽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군 전쟁에 나섰다. 인류사에서 분열과 갈등은 늘 반복되어 온 그림자였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이 보편적 현상을 극단적인 내전의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분열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왜 독립을 요구하는지, 전쟁이 정확히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관객에게 주어진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갈등의 실체를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을 은유한다. 지금도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갈라졌는가’라는 질문에 선명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관객은 기자 리의 시선을 따라간다. 리의 카메라는 차갑고 냉정하다. 정부군과 시민들이 대치하는 장면에서도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임무에 충실하게 셔터를 누른다. 이 모습은 프로페셔널한 기자 정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갈등을 단지 기록할 뿐 자기 책임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냉혹한 태도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리는 제시라는 소녀와 조우하며 변곡점을 맞는다. 프레스 조끼조차 없는 제시에게 자신의 조끼를 건네는 순간, 그들 사이에 연대가 형성된다. 이후 리, 조엘, 제시, 새미 네 명의 기자는 함께 워싱턴을 향해 떠난다. 관객은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분열의 참혹함과 언론의 역할을 동시에 목격하게 된다.
참혹한 분열의 현장
내전을 취재하는 여정 속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참혹한 현실이다. 주유소 장면은 경제와 치안이 무너진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인플레이션으로 달러 가치가 폭락했고, 법과 제도의 공백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무기를 들어 생존을 지키도록 내몬다. 질서는 붕괴되고, 힘만이 지배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이어지는 장면은 내집단 간의 살육이다. 동료가 쓰러지자 남은 이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포로는 자비 없이 처형된다. 전쟁의 참상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외집단 간의 갈등이 아니라 같은 민족, 같은 국가였던 이들이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모습은 오히려 더 잔혹하다.
하지만 다른 풍경도 있다. 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기자들은 놀란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주민들의 일상은 평화롭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응한 마을 사람들은 전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립적 태도, 혹은 책임 회피에 가까운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옥상 위 무장한 남성들의 존재는, 그들 역시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분열의 불안이 깊숙이 배어 있는 것이다.
여정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낯선 차의 추격, 토니의 장난, 그리고 순간의 안도. 그러나 제시와 리의 차가 따로 달리면서 균열이 생기고, 곧 그들은 와스프(WASP)로 보이는 비정부군에 붙잡힌다. 토니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인종 혐오가 전쟁의 논리보다 더 앞서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새미의 죽음은 분열이 남긴 상흔을 상징한다. 기자들은 그의 희생을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곧 도착한 서부군 기지에서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다. 정부군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애도할 시간조차 없이 워싱턴으로 향하고, 링컨 기념관이 폭파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통합의 상징이 무너지는 순간, 분열은 절정에 달한다.
이 여정 끝에 남는 것은 환멸이다. 내집단끼리의 싸움 끝에 얻은 승리를 승리라 부를 수 있을까. 웃음을 짓는 병사들의 모습은 허무를 남긴다. 관객은 아군과 적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분열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시선으로 이동하게 된다.
저널리즘의 책임을 묻다
두 번째 깨달음은 저널리즘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리는 초반 종군기자로서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제시 같은 젊은 기자들의 존경도 받았다. 그녀는 스스로 “정부를 각성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자들은 상황을 기록할 뿐, 책임을 지지 않는다. 판단은 대중에게 넘겨진다.
리 역시 새미를 무능한 노인 기자로 깎아내렸다. 그러나 위기에서 그들을 구한 것은 리가 아니라 새미였다. 그는 끝내 목숨을 잃었지만, 그 죽음은 숭고했다. 리는 새미의 피로 물든 시트를 닦다가 셔츠가 붉게 물드는 순간, 새미의 희생을 계승한다. 제시에게 조끼를 물려주었던 것처럼, 리는 이제 새미의 저널리즘을 이어받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리가 제시를 구하면서, 처음으로 기자가 누군가를 ‘살린다.’ 기록만 하던 그녀가 생명을 지켜낸 것이다.
반면 제시와 조엘은 끝내 각성하지 못한다. 대통령이 목숨을 구걸하는 순간조차 그들은 인터뷰를 요청하고 사진을 찍는다. 영화는 이 대비를 통해 진짜 저널리스트와 가짜 저널리스트를 극명하게 갈라놓는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묻는다. 언론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기계여야 하는가, 아니면 책임 있는 행위자여야 하는가. 리의 변화는 후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자가 목격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으로서 책임을 자각하는 순간, 진정한 저널리즘이 시작된다는 메시지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
우리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른 채 서로를 혐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분열은 과거보다 더 복잡해졌고, 공격은 더 잔혹해졌다. 오늘날 매스컴은 이를 증폭한다. 가짜 뉴스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혐오를 조장하는 매체들은 넘쳐난다. 사람들은 각자의 진영 안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소비하며, 사회의 균열은 더 깊어진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단순히 내전을 다룬 픽션이 아니다. 그것은 분열을 기록하고 소비하는 현대 사회의 거울이다. 영화 속 기자들이 그랬듯, 우리도 갈등을 기록하고 재생산하는 관객이자 시민이다. 저널리즘이 책임을 외면한 채 죽음만을 추적한다면, 분열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분열을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저널리스트처럼 스스로 각성할 것인가. 우리는 가짜와 진짜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그리고 이 무의미한 갈등을 끝낼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링컨 기념관이 무너지는 장면처럼, 통합의 상징이 사라진 시대에 관객에게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시빌 워: 분열의 시대>가 남기는 가장 불편하면서도 필요한 질문이다. [객원 에디터 이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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