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의 괄호 너머의 선율을 기억하며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 아직도 가끔 괄호가 닫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때때로 음악을 들으며, 그가 아직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가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음악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괄호 너머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그의 피아노 선율들을 같이 들어보고자 한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2주간의 심장 박동

“중국이 배경이지만 이건 유럽 영화고, 전쟁과 격동의 역사 속 이야기지만 결국은 현대 영화야. 그런 것을 보여줄 만한 음악을 만들어.”

<마지막 황제>의 베르톨루치 감독이 실제로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주문한 내용이다. 이런 막연한 말과 함께 2주의 시간을 약속해 주었다. 나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했을 상황에서 그는 서양풍의 오케스트라 음악에 중국적인 요소를 넉넉히 담고, 1920-1930년대 파시즘의 대두가 느껴질 만한, 이를테면 독일 표현주의적 요소가 들어간 음악을 머릿속에 그려봤다고 한다. 그러고는 곧장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20가지 정도의 중국 음악 앤솔러지를 종일 전부 듣고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과 병행하여 낮에는 녹음을 밤에는 수정을 날마다 되풀이했다.

결국 그를 과로로 인한 입원으로 이끈 2주의 시간을 거쳐 나온 것이 영화 <마지막 황제>의 음악이다. 편집으로 인해 그가 작곡한 44곡의 절반도 되지 않는 분량만 영화에 실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는 그였지만, 아시아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이라는 보상을 받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Where Is Armo>, <Rain>, <The Last Emperor> 이 3곡을 추천한다.

여담으로 <마지막 황제>에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배우로도 출연한다.

[류이치 사카모토 플레잉 디 오케스트라 2014 스틸 컷, 사진 = LIVET]
[류이치 사카모토 플레잉 디 오케스트라 2014 스틸 컷, 사진 = LIVET]

30초의 영원

류이치 사카모토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 있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그의 기준선이기도 하다. 그가 이 멜로디를 떠올리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 정도였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이 그의 남은 인생을 연주했다.

그는 늘 <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뛰어넘는 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려달라고 하니, 어지간히 질려버린 탓이었다. 이 덕에 이 곡을 봉인하던 시기도 10년 가까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럴 킹과 제임스 테일러의 콘서트를 본 것을 계기로 이 곡의 연주를 재개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곡인 <You’ve Got a Friend>’를 듣기 위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캐럴 킹은 좀처럼 그 곡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콘서트의 마지막 순간에 그 노래가 나왔고 그는 안도감 속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자신의 콘서트에 오직 <Merry Christmas Mr. Lawrence> 한 곡만을 목적으로 오는 관객의 존재도 결코 부정할 수 없음을 그제야 비로소 납득하게 되었다.

발매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곡인 만큼, 버전도 많고 이를 샘플링한 다양한 곡들이 있지만 꼭 원곡으로 듣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곡의 제목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영어판 제목이다.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가 주연 배우로도 열연한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 컷, 사진 = 씨네룩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 컷, 사진 = 씨네룩스]

남겨진 음표들

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의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솔직하게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의 새로운 작품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언제나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때만큼은 그의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자신의 기력이 다해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고 싶다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자신에겐 음악이 마루턱의 찻집 같아서 아무리 지쳐 있어도 그것이 보이면 달음박질하게 되고, 주먹밥 하나 먹고 나면 남은 절반의 등산도 문제없다던 그의 남겨진 일기장의 일부가 그 심정을 대변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괴물>보다 그는 일찍 떠났다. 그가 남기고 간 자리에서는 그의 음악만이 흘러나왔다.

<괴물>에서는 그의 새로운 곡과 기존에 있던 곡이 절묘하게 조화된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Aqua>가 들려올 때, 그의 마지막 변화를 마주하며 그를 추억하게 되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전에 좋아했다는 말이 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는 그 짧은 인생 안에서, 긴 예술의 선율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마지막까지 추구했던 침묵과 떨림, 그 사이의 영원한 울림이 그 짧은 인생을 더욱 빛나게 했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그의 음악을 재생하며 이렇게나마 그를 추억한다. [객원 에디터 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