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간을 견디며 다시 삶을 잇는 성장에 대하여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

중년기는 흔히 ‘성숙한 어른’의 시기로 인식되지만, 때로는 돌연 삶이 무너지는 상실과 균열을 마주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외적으로는 안정된 듯 보이지만, 이면에서는 정체성의 흔들림과 새로운 의미에 대한 갈망이 교차한다.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줄리에타>는 바로 이 ‘중년의 균열’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사라진 딸 ‘안티아’와의 단절,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죄책감, 침묵 속에서 무너져가는 여성의 심리를 따라가며, 다시 삶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한 인물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성인 중기’에 찾아오는 정서적 위기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우리가 이 시기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를 조용히 묻는다.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 삶을 잇는 시간 – 생성감과 침체감의 갈림길에 선 중년기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중년기를 ‘생성감 대 침체감(generativity vs. stagnation)’의 시기로 정의한다. 생성감은 타인에게 기여하고 돌보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상태다. 반면, 침체감은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느끼며 관계와 사회로부터 단절되는 무력감의 심리다. 

이 시기의 중심 과제는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통해 사회와의 연결을 이어가고, 그 안에서 삶의 지속성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생성감은 자녀 양육뿐 아니라, 직업적 성취, 대인 관계, 사회 참여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드러난다.

건강하게 생성감을 성취한 사람은 돌봄(care)과 창조성(creativity), 생산성(productivity)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게 되고, 이는 곧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확신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타인과의 연결이 끊기거나 사회적 역할이 축소될 때, 혹은 자신이 더 이상 무엇도 줄 수 없다고 느낄 때, 중년은 침체감과 자기중심성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줄리에타가 겪는 고립과 죄책감은 바로 이 침체의 감정선 위에 놓여있다.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 불시에 찾아온 침묵 – 단절의 고통

줄리에타는 어느 날 거리에서 딸 안티아의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마주치고, 딸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순간 그녀는 곁에 있던 연인을 떠나 안티아의 흔적이 남은 옛집으로 돌아가,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 편지를 통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딸과의 단절에 이른 상처의 궤적과,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는 마음을 함께 그려낸다. 

딸을 잃은 줄리에타는 점점 사회적 관계를 끊고, 정서적으로도 고립되어 간다. 이는 단순한 상실이 아닌, 자신이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라는 죄책감과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내가 해줄 수 없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라고 고백하며, 그 죄책감이 자신을 서서히 침체의 상태로 몰아넣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서적 침체는 중년기 많은 이들이 겪는 심리적 위기이기도 하다. 아이가 독립하거나, 관계가 멀어지거나, 예기치 않은 이별이 찾아올 때, 우리는 과거의 역할과 현재의 공허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줄리에타가 보여주는 것은, 단절의 고통이 단지 상실 자체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누군가를 돌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감의 붕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 침체의 심연에서 생성의 가능성으로

줄리에타는 침묵과 회피 속에 살아가지만, 딸에게 편지를 쓰며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언어화하기 시작한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잃어버린 시간을 복기하면서 그녀는 내면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영화의 말미쯤 줄리에타는 “딸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자신과 삶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다시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는 가능성, 다시 자신을 돌보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성감의 회복을 암시한다.

심리학적으로 생성감은 단지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을 넘어, 삶에 기여하고,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는 방향성이다. 줄리에타는 딸에게 닿지 못할지라도, 그 마음을 편지로 쓰며 언어로 남기고, 또다시 삶을 이어가겠다는 선택을 통해 침체감을 딛고 생성의 길로 나아간다.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 상처는 말하지 않으면 깊어진다. - 서로의 고통을 꺼내는 용기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함께 보낸 물리적 시간이나 공간적 거리만으로는 상대의 내면에 닿기 어렵다.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한 경험과 고통을 겪어 보았을 때라야 비로소, 상대의 감정에 진심으로 다가설 수 있다.

줄리에타는 남편 소안을 잃은 후 무너졌고, 안티아는 그런 엄마를 돌보며 자신도 잃어버렸다. 줄리에타는 상실에 매몰되어 딸의 아픔을 돌보지 못했고, 안티아는 엄마가 무너질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감정을 감췄다. 결국 그 침묵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만든 독이기도 했다. 진정한 성숙은 상처를 피하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함께 들여다보고, 견뎌내는 과정 안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히 전한다.

시간이 흐른 뒤 안티아가 보낸 편지 속에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아픔이 담겨 있다. “그땐 짐작도 못했어. 그때 알았더라면 아무도 아프지 않았을 거야.” 이 문장은 줄리에타의 굳게 닫혔던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오랜 시간 이어졌던 침묵의 벽이, 마침내 ‘이해’라는 문장 하나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말은 없었지만, 주소가 남겨졌고, 줄리에타는 조심스럽게 다시 딸에게 가기로 결심한다. 기다린다는 말은 없었지만, 찾아와도 괜찮다는 뜻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미뤄둔 말들과 꺼내지 못한 감정은 그렇게 오랜 침묵의 끝자락에서 천천히 서로를 향해 열린다.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 스틸 컷, 사진 =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 중년의 고요한 성숙 – 우리가 건네야 할 감정의 말들

<줄리에타>는 중년기의 감정이 단지 ‘성숙’이나 ‘안정’으로 대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감정은 더 깊고, 말은 더 신중하며, 내면은 더 복잡해진다. 이 시기의 진짜 성숙은 완전함이나 강함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고도 여전히 관계를 붙드는 데서 비롯된다.

줄리에타는 딸의 부재를 견디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엄마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되찾는다. 그것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감정을 성찰하며, 침묵을 견디고 내면에 잠겨 있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해 가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진짜 성숙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 다음 회차 예고 

다음 회차에서는 영화 <아무르(Amour, 2012)>를 통해, 에릭 에릭슨의 마지막 발달단계인 ‘자아 통합 대 절망(ego integrity vs. despair)’을 살펴보려 한다.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며 존엄과 감정을 끝까지 품는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 존재의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어질 것이다. [객원 에디터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