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관계의 심리] ‘그린 북’,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관계 스크립트를 고쳐 쓰게 될까?

2025-11-21     석윤희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우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린 북>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남자가 각자 오래 붙들고 있던 편견과 관계 스크립트를 조금씩 풀어내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조용한 여정을 따라간다.

1962년, 짐 크로 법이 미국 남부를 지배하던 시대. 이탈리아계 운전사 토니와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정해진 틀 속에 가둔 채 관계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행 속에서 쌓이는 일상의 순간들은 두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다. 서툴지만, 서로를 지켜 주고, 상대에게 없는 방식을 빌려주며 관계는 우정의 형태로 천천히 변화해 간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관계의 전제가 된 시대, 그린 북과 짐 크로법

영화의 제목 <그린 북>은 흑인 여행자를 위한 실제 안내서 「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에서 왔다. 이 책은 차별이 심한 지역을 이동하던 흑인들이 안전한 숙소와 식당을 찾기 위해 펼쳐 들던 생존 안내서였다.

이 안내서가 필요했던 이유는 1962년 남부가 여전히 민권법 제정 이전의 ‘짐 크로법(Jim Crow Laws)’이 일상을 지배하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호텔·식당·화장실·학교를 사용할 수 없었고, 곳곳의 ‘White Only(백인 전용)’ 표지판은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뚜렷하게 나누고 있었다. 이 불평등한 규칙 위에서 토니와 셜리의 여정은 시작된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관계 스크립트, 서로를 고정된 틀 속에 두는 마음

‘관계 스크립트’란 “이런 사람과는 이렇게 관계 맺는다"라는 내면의 대본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백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인종, 직업, 말투, 태도 같은 단서를 통해 과거의 경험과 사회적 이미지를 호출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상대를 특정한 틀 속에서 해석한다.

토니와 셜리는 만나기 전부터 이미 상대를 향한 스크립트를 품고 있다. 토니에게 흑인은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 상류층은 “나를 내려다보는 존재”다. 셜리에게 이탈리아계 남성은 “소란스럽고 거칠다"라는 이미지이고, 토니는 처음부터 “예의와 교양이 부족한 운전사”로 규정된다.

초반의 두 사람은 이 고정된 틀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함께 식사하고, 차 안에서 프라이드치킨을 나누고, 부당한 상황에서 나란히 서는 작은 순간들이 쌓이면서 두 사람은 자신이 오래 붙잡고 있던 스크립트를 조금씩 수정해 간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정서 번역, 마음을 대신 말해 주는 관계

관계의 심리에서 누군가는 감정은 풍부하나 언어가 서툴고, 또 어떤 사람은 언어는 유려하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때 한 사람이 상대의 감정을 말로 대신 표현해 주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친밀감의 통로가 열린다.

이 원리는 영화 속 ’편지‘ 장면에서 선명하다. 투어 중 토니는 아내에게 감정을 쓰지 못해 망설이지만, 셜리는 그의 감정을 문장으로 정리해 준다. 이 사소해 보이는 장면에서 셜리는 토니의 정서 번역자가 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반대로 차별 앞에서 셜리가 감정을 억누르려 할 때 토니는 거칠고 분명한 항의로 그의 마음을 대신 드러내 준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던 방식을 빌려주는 이 순간들 속에서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상호성의 회복, 서로를 지켜 주는 관계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명확한 비대칭 위에 놓여 있다. 셜리는 ’고용주‘이고, 토니는 그를 지켜야 하는 보디가드 겸 운전사‘다.

하지만 남부로 갈수록 상황이 달라진다. 무대 밖에서 셜리가 겪는 차별 앞에서 토니는 몸으로 그를 지키고, 반대로 불심검문으로 유치장에 갇힌 순간에는 셜리의 사회적 자본이 두 사람을 구한다.

관계의 심리에서 한쪽만 주고 한쪽만 받는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토니와 셜리는 서로에게 없는 자원을 내어주며 수평적 동료에 가까운 관계로 이동한다. 상호성이 회복되는 순간, 관계는 비로소 우정의 가능성이 열린다. 우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경험 위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소속감의 회복, 문 안으로 초대된다는 것

누군가를 집 안으로 들여온다는 것은 단순한 방문을 넘어 조용히 우리 편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환대의 신호이며, ’당신이 이곳에 있어도 괜찮다‘는 감정의 승인이다.

토니가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꼭 집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켜 주기 위해 폭설을 뚫고 직접 운전을 해 온 셜리. 함께 올라가자는 토니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 듯하던 셜리는 곧 토니의 집을 찾는다. 문을 열어 반겨주는 토니, 그의 아내와 가족들의 환대. 이 순간 셜리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집 안으로 초대받는 따뜻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고 느껴온 셜리에게 이 순간은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셜리는 어떤 인종, 계급, 음악 장르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주변적이고 디아스포라적인 예술가로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어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경험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했던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라는 오래된 내면의 서사가 ”적어도 이 집에서는 자리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조용히 수정하는 계기가 된다.

우정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처럼 누군가의 집 문 안으로 조용히 초대되는 소소한 일상들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심미안의 시선

관계란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

관계의 심리는 흔히 ’나와 타인의 문제‘로 설명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언제나 ‘나와 나 자신에 대한 서사’가 함께 흐른다. 우리는 타인을 바꾸려 할 때보다, 타인을 통해 나를 새롭게 바라볼 때 더 깊이 변한다. <그린 북>은 인종과 편견이라는 큰 주제를 넘어, 관계가 어떻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토니는 스스로를 ”거칠지만, 가족을 지키는 사람“으로 규정해 왔지만, 셜리와의 여정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부당함 앞에서 목소리를 내며, 편지 한 줄을 위해 마음을 고르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그의 내면 문장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로 조용히 바뀐다.

셜리 역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라는 오랜 서사를 품고 살아왔지만, 토니의 집에 초대받은 경험을 통해 그 문장은 ”적어도 이 집에서는 자리가 있다.“로 재작성된다.

<그린 북>이 보여주는 것은 누군가가 영웅처럼 편견을 깨뜨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내면 문장을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강하게 함께 편집해 나가는 과정이다. 관계는 그렇게 우리가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문장들까지 함께 다시 써주는 섬세한 편집자가 된다.

['그린 북'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 다음 연재 예고

[영화로 읽는 관계의 심리] 다음 회차에서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서 있는 두 사람, 즉 파트너·커플 관계의 심리를 다루어 보려 한다. 사랑과 갈등이 동시에 존재하고, 함께 살아도 때때로 가장 멀게 느껴지는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어디에서 상처받으며, 또 어떻게 다시 연결되려 할까?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 주연의 <결혼 이야기>(2019)를 통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심리와 관계가 지닌 미묘한 온도를 천천히 들여다볼 예정이다. [영화 심리 칼럼니스트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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