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유브 갓 메일'
우리는 지금 진짜로 통(通)하고 있나요?
좋은데 피곤한 우리네 멜로
언제부턴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일 자체가 피곤하다는 걸 누구나 쉽게 인정하게 됐다. 마음엔 여유가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며, 인간관계는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교류에는 품이 든다. 진심을 요하는 공감과 소통은 더더욱 그렇다.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을수록 관계는 사치가 된다. ‘내가 지금 누굴 만날 땐가?’ 하는 자기 검열이 일상이 된다.
사람 만나는 일이 어디 쉽나. 연애고 썸이고 다 좋은 거 알겠는데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 피곤한데. 애쓸 일이 너무나 많다. 어쩌면 영화·드라마보다 절절한 것이 현실이겠다. 로코(로맨틱 코미디)의 ‘코’도 쉽지 않은 퍽퍽한 세상에서 사랑만 가지고 밀어붙였다간 “거참, 현실 감각 한참 떨어지네”라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이야기판에서도 마찬가지다. 낭만 주축의 멜로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재를 잘 반영해야 볼 맛이 난다. 남녀의 알콩달콩 서사만으로는 어딘가 심심하다. 그저 소모적인 연애담에 그치지 않으려면 무언가 더 있어야 한다. 마음 써야 하는 일에 씁쓸히 스위치를 내리고 마는 우리. 그런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이야기’는 대체 어떤 효용이 있는 걸까? 볼만한 가치가 정말로 있는 것일까?
삶이 고루 반영된 로코물
지지고 볶는 신만 가득하다면 이야기는 밀도를 갖기 어려울 거다. 돌고 돌아 끝내 운명을 찾는다는 흐름 안에 삶의 조각이 골고루 퍼져 있어야 균형감이 느껴진다. 이를테면 먹고사는 얘기나 예기치 못한 변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순간 같은 것들.
영화 <유브 갓 메일>은 언뜻 보면 90년대 정통 로코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일상적인 삶의 풍경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작품이다. ‘대형 서점 VS 개인 서점’이라는 대립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물리적으로, 심적으로 뜻밖의 변화를 겪게 되는 주인공의 선택을 지켜볼 수 있다. 당사자인 캐릭터들은 골머리가 썩겠지만 감상하는 입장에선 그게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참 쉬운 일이 없구나 하고 공감하게 된다. 여전히 유효한 삶의 고민은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한다.
당신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유브 갓 메일!”
메일 도착 알림 소리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슬금슬금 모니터 앞으로 다가간다. 이 두 남녀, 그러니까 ‘조’(톰 행크스)와 ‘캐서린’(맥 라이언)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접점 하나가 있다. 바로 일면식은 없으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상을 긴밀히 공유하고 있다는 것! 온라인상에서 그들은 ‘NY152’(조의 ID), ‘샵걸’(캐서린의 ID)로 활동하며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아주는 서로에게 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허나 온라인 세상과는 달리 현실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어머니가 물려준 작은 아동책 서점을 운영하는 캐서린. 그녀는 대형 서점인 ‘폭스문고’의 등장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가게에 이어 출판 파티에서 또 한 번 우연히 만나게 된 그 조라는 자가 평소에 저주하던 망할 대기업 폭스문고의 사장, 조 폭스였다는 걸 알게 된다.
조의 정체가 밝혀진 후 둘은 마주칠 때마다 티격거린다. 여전히 서로가 메일 속의 당사자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온라인에서는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로, 현실에서는 밥맛 떨어지는 앙숙으로 왔다갔다하며 지낸다. 그 간극은 영화에 잔재미를 불어넣는다.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이 샵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조(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는 신은 영화에서 확인하는 게 훨씬 재밌다). 자신을 앞에 두고 NY152남을 사모하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마침 둘에게는 여러 변화가 찾아온다. 각자의 연인과 더는 함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정리하는 캐서린과 조다. 허세가 있던 조는 캐서린을 통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고 본격적으로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부심으로 여겨 온 가게를 정리한 캐서린은 가슴 아프지만 지금이 바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순간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각자의 굴곡을 통과하며 마주한 서로는 더 이상 전 같지 않다. 확신에 찬 조와 달리 모든 게 헷갈리기만 한 캐서린이다. 거기에다 “우리 만날래요?” 직구를 던진 NY152남 때문에 그녀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노라 에프론 감독의 편안하고 따뜻한 연출
90년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각본)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연출)은 편안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연출로 정평이 나 있는 노라 에프론 감독의 대표 작품이다.
특히 <유브 갓 메일>(1998)은 1940년 작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모퉁이 가게>를 시대 흐름에 맞게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노라 에프론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단연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선물샵에서 일하는 두 남녀가 서로 펜팔을 주고받는다는 원작의 설정을 모티브로 하여 동종 업계 종사자 간의 라이벌 구도로 이야기를 가져가면서 아직 내게 오지 않은 ‘인연’에 대해서도 한 번쯤 그려볼 수 있게 만든 로코 영화다.
갑작스럽지만 그런 말이 생각난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아주 쉽게 해낸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쉬워 보여도 결코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감독 특유의 감각이 영화를 빛내고 있다.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톡톡 튀어 오르는 인물들의 티키타카 신은 작품 전반에 생기를 불어넣고, 마치 짧은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감성적인 내레이션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깊이 빠져들도록 만든다. 천천히 스며드는 따스한 그 정서가 영화의 몰입을 돕고 있다.
하나의 그림체 같은 90년대 풍경
90년대의 영화적 풍경을 하나의 그림체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 시절 멜로물이 독보적인 데에는 당시의 영상미가 한몫했다고 본다. 뽀얗게 뭉개지는, 포근한 필터를 한 겹 입은 듯한 특유의 화면 질감은 같은 장면도 어딘가 쓸쓸하고 아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분명 밝고 따스한데 서글픔이 새어 나오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또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연인을 연기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유브 갓 메일>로 또 한 번 호흡을 맞췄다. 조와 캐서린 그 자체였던 두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납득이 갈 거다. 톰 행크스의 능청스러우면서도 무게감 있는 연기와 맥 라이언의 사랑스럽고 톡톡 쏘는 연기 합이 좋다.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한 인물 표현이 보는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 이 둘을 대체할 만한 사람이 아예 떠오르지 않는다.
애정하는 ‘불통’의 엘리베이터 신
‘불통’을 논할 때 이보다 더 좋은 장면이 있을까.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고, 함께 있어도 함께이지 않은 동상이몽의 순간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한 엘리베이터 신이다. 조와 조의 애인이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여러 사람과 함께 갇히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서 오갔던 대화가 꽤 인상적이다.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안해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여기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건 마치 꾹꾹 눌러 놨던 제 속마음을 고백하는 것과도 같았다. 대부분이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다. “엄마하고 얘기할 거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거야”처럼.
하지만 조의 애인은 달랐다. “여기서 나가면 당장 라식 수술받아야지!” 순간 사고가 정지된 조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뒤지며 “내 시계 어딨어?”하고 짜증 내는 애인을 바라보다 이내 모든 것이 분명해진 표정을 짓는다. ‘그치... 이건 아니지..!’ 한 시간 후에야 엘리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었던 조는 반려견 브링클리와 짐가방 하나만 챙겨 연인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나온다. 아마 그건 자기 인생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그의 영혼을 실은 최초의 선택이었을 거다.
조가 느껴왔을 묘한 어긋남을 2025년에 대입해 봐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시의성을 갖기 더 좋다. 마음 한편에 구멍 하나쯤 가지고 있는 우린 참 바쁘다. 특히 자기 말만 하느라 바쁘다. 다들 여력이 없다 보니 어딘가 일방적이다. 소통은 알맹이 없이 자꾸만 겉돌고 함께해도 끝내는 외로운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다. 겉으론 같이 행동하는 듯하지만 마주하는 상대에게 진심으로 집중하고 마음 기울인 적은 정말로 드물어 보인다. 제대로 들어주는 게 이렇게 귀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관계의 진정성. 중요한 건 진짜로 통(通)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인데 그게 왜 이렇게 보기 힘든 신이 됐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린 이해받고 싶어서 외로운 건가 봐
‘인간의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하고 그 출발점에 대해 접근하려 들면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싶어 갑자기 아득해진다. 분명한 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외로움이라는 게 우리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건 단순히 누군가가 곁에 있고 없고를 나타내는 물리적 의미는 아닐 거란 것이다.
허기와도 같은 외로움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혼자 알아서 처리해야 할 감정 같지만 그러기엔 조금은 억울한 면도 있다. 빠른 변화 속에서 잠깐만 멈춰 있어도 죄책감을 느끼기 쉬우니까. 조급함은 자신의 존재감을 의심하는 데 쓰기 좋은 땔감이 된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까?’ 하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 요즘의 외로움 같기도 하다. 피곤해도 언젠가는 진짜 사랑을 해보고 싶고, 혼자가 편해도 정말로 외롭고 싶진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 않을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더 외로워진다는 걸 사람들은 이미 아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유브 갓 메일>이 인간의 기본적인 외로움을 섬세하게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멜로 영화에다 대고 뭔 소린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멀리서 보면 로코 같은데 자세히 볼수록 소통이 고픈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사랑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쓸쓸한 마음이 먼저 보였다.
조와 캐서린이 살던 때나 시공간 제약 없이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지금이나 서로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불통의 순간은 여전한 듯하다.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또한 여전하고. 외로움에 취약한 우리는 저기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것엔 자신 없지만 언젠가 날 알아줄 미지의 한 사람을 몰래 그리며 꿋꿋이 살아간다. 속는 셈 치고 혹시나 하는 그 소망에 기대어 보는 거다. 아우, 지겹다 지겨워.
이번 가을은 무척 추울 거라고 한다. 드라이 맡겼던 트렌치코트는 매년 꺼낼 타이밍을 놓친다. 사실 이번에도 텄다. 갑자기 얼굴을 싹 바꾼 계절을 내 옷이 감당하지 못한다. 두면 언젠가는 입겠지 하고 그냥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 나의 트렌치코트는 높은 행거에 조기처럼 매달려 있다. 일종의 보상 심리가 작동한 나는 영화나 몇 번 더 돌려 보기로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쌀쌀할 때 보면 더 제맛 난다는 건 안다. 이 계절이 달아나기 전에 한번 보시라는 말을 남긴다. [객원 에디터 한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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