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무너뜨린 시선의 힘, '전장의 크리스마스'

2025-11-06     박하나

| 다시 군복을 입고,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무엇을 ‘보는가’

폭력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잊혀진 황군>, 나체로 자유를 선언한 <감각의 제국>, 그리고 과거의 망령을 소환한 <열정의 제국>을 지나 도달한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시선의 영화’다. 다시 군복을 입은 군국주의는 ‘포로수용소’라는 거대한 제국의 밀실 속에 갇혀,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낸다. 이 지점에서 <감각의 제국> 속 사다와 키치조가 국가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숨어든 방은 ‘밀실 속의 밀실’로 읽힌다. 일반적으로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오시마 나기사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는 영화로 평가받지만, 결코 단순한 인도주의적 화해나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 군복과 포로수용소라는 가시적 장치를 통해 군국주의의 원형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순수성과 타락을 실험하는 ‘제국 시리즈’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 이것은 반란이다 - 제국이여 응답하라

오시마 나기사는 세 번에 걸친 셀리어스(데이비드 보위)의 시선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첫 번째는 극의 초반부 처형이 진행되기 직전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셀리어스는 처형당하기보다도 눈가리개를 쓰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때의 시선은 ‘응답’을 요구한다. 총살형에서 눈가리개를 착용하는 이유는 아군이 처형되는 포로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함이다. 제국의 질서가 유지되는 이유는 ‘폭력을 직시하지 않음’에 있다. 행하는 자만 있고, 답하는 자는 없는 폭력의 메커니즘에서 오시마 나기사는 보지 않음으로써 유지되는 군국주의의 시각적 구조를 전복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두 번째 시선은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요노이가 드 용 대령의 목을 베기 직전, 셀리어스는 그의 앞에 꼿꼿이 서 두 눈을 쳐다보고, 두 뺨에 입을 맞춘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균열의 기폭제적 시선이다. 일본군은 응시의 주체로, 영국 포로군은 대상으로 기능하던 수용소에서 셀리어스의 두 번째 시선은 응시를 되돌려주는 행위다. 즉, 폭력의 구조를 ‘반사’하는 일종의 시각적 반란 행위다. 셀리어스의 키스는 오시마 나기사의 전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적 제스처의 일환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데, 이것이 군국주의를 무너뜨리는 처방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요노이가 무사도로 수혈하던 참군인의 정체성은 짧은 접촉 한순간에 송두리째 무너진다. 두 번째 시선과 입맞춤을 통해 순수 인간성이야말로 군국주의의 불꽃을 잠재울 수 있는 희망이라고, 오시마 나기사의 카메라는 말하고 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 신화적 응시, 지속되는 시선의 힘

마지막은 영원토록 우리를 응시하는 ‘지속의 시선’이다. 오시마 나기사는 이 장면을 통해 응시의 권력이 제국의 폭력과 죽음보다도 강력한 오래 지속됨을 보여준다.  셀리어스는 매질의 흉터까지 땅 아래로 깊숙이 파묻힌 채, 고개 너머로 한참 무언가를 응시하는데 그 대상이 현실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초현실적 시선으로 읽힌다. 셀리어스의 죽음은 마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 같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성년이 되기 전 한 번의 죽음을 겪었다. 제우스의 아들인 그는 헤라의 시샘으로 티탄들에게 찢겨 죽는다. 티탄들이 그의 살을 먹고, 제우스가 그들을 번개로 쳐서 태워버린 뒤, 그 재로부터 인간이 태어난다. 재에 섞인 그의 살점은 셀레네의 자궁을 빌려 성년의 디오니소스로 부활한다.

영화의 후반부 로렌스(톰 콘티)와 하라 상사(기타노 다케시)의 대화에서 셀리우스의 죽음은 마치 ‘신화’처럼 재소환된다. 디오니소스의 부활처럼,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찢긴 셀리어스의 신체는 윤리의 씨앗을 품고 세상에 남는다. 윤리의 씨앗은 ‘인간성’의 가능함을 사유토록 한다. 그의 주마등에서도 순수 인간성이 드러난다. 그는 고교 시절 장애인 동생의 괴롭힘을 방관한 이후 지속적인 죄책감에 시달려 삶을 온전히 영위하지 못했고 껍데기뿐인 삶을 쇄신하고자 군에 지원했다. 마지막 순간, 초현실의 세계에서 동생으로부터 받는 용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순수성의 증거로 기능한다. 무수한 죽음이 뒤섞인 제국의 땅에서 우리는 하얀 나비가 이끄는 순수성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 장르를 뛰어넘어, 시선의 힘으로 - 제국을 해체하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들은 ‘장르적 변주’를 통해 제국을 해체하는 ‘시선의 정치학’을 완성했다. <잊혀진 황군>의 다큐멘터리적 응시는 잊힌 자들의 실체를 드러내며 현실의 부정을 고발했고, <감각의 제국>의 관음적 시선은 이데올로기적 욕망과 급진성을 제시했다. 이어 <열정의 제국>은 억압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과거를 부정하는 일본 사회의 무의식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이르러, 오시마 나기사는 ‘보는 자’와 ‘대상’의 위치를 완전히 뒤집었다. 응시의 주체는 피해자  혹은 인간 그 자체로 귀환하고, 역으로 제국은 수용소에 가두는 대상으로 전복된다. 이처럼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폭력을 해부하고, 그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객원 에디터 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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