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관계의 심리] ‘마빈의 방’, 상처받은 후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2025-11-03     석윤희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용서한다는 건, 결국 사랑을 다시 믿는 일이다.”

메릴 스트립, 다이안 키튼, 그리고 젊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함께한 영화 <마빈의 방>은 오랜 시간 멀어져 있던 자매가 다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해 가는 과정을 통해 ‘가족 안의 사랑과 회복’을 조용히 그려낸 작품이다.

20년 동안 서로를 원망하며 떨어져 살아온 두 자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조카. 이들이 한 지붕 아래 모이면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사랑, 책임, 용서 그리고 회복의 의미를 다시 배우게 된다. 용서란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내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다. <마빈의 방>은 ‘돌봄의 역설’과 ‘사랑이 남긴 빛과 그림자’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상처를 준 관계에서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 돌봄의 역설, 사랑이 남긴 빛과 그림자

베시는 평생을 타인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녀에게 돌봄은 사랑이자 사명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소모시키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의 형태로 다가왔고, 그 책임은 의미 있었으나 그녀를 서서히 지치게 했다. 그녀가 비춘 사랑의 빛 뒤에는 늘 피로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베시에게 돌봄은 구원이자 소멸이었다.

베시는 타인의 고통을 품으며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이타적 자아(altruistic ego)의 전형이다. 반대로 리는 돌봄을 피하며 살아왔다. 병든 아버지를 두고 집을 떠났던 기억은 죄책감으로 남았고, 그 감정을 통제로 덮으며 자신을 보호해 왔다. 그녀의 냉소와 거리감은 사랑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방어였다.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베시가 자신을 녹여내며 사랑한다면, 리는 벽을 세우며 사랑을 경계했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방식의 사랑은 결국 오해를 낳았고, 그 오해가 시간이 흘러 용서의 시작점이 된다. <마빈의 방>은 이처럼 돌봄이 어떻게 화해의 언어로 바뀌는가를 보여준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 조카들의 골수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베시는 죽음의 불안을 마주하면서도 동생 리에게 담담히 말한다.

“리, 난 정말 복 받은 사람이야. 아버지와 고모를 돌볼 수 있었잖아. 돌아보면 참으로 큰 사랑이었어.”

“언니를 무척 사랑하셨지.”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그분들을 사랑했다는 뜻이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너무 감사해.”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베시의 말에는 현실을 부정하는 위로나 미화가 아니다. 그것은 상실과 고통을 넘어 자기 수용으로 얻은 평온, 소진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려는 사람의 고요한 통찰이다. 이는 로고테라피의 관점인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인간은 견딜 수 있다.”라는 통찰과 맞닿아 있다.

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난 두 자매는 서로를 통해 돌봄의 또 다른 얼굴을 배우게 된다. 베시는 돌봄을 ‘자기희생’이 아닌 ‘자기 수용’의 형태로 다시 정의하고, 리는 ‘의무’가 아닌 ‘사랑의 표현’으로 돌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며 끝까지 곁에 머무는 일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사랑이 자란다.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 행크의 성장기, 사랑을 배우는 법

리의 아들 행크는 영화 속에서 가장 거칠고 불안한 인물이다. 언제나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그의 태도 뒤에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다.

리의 양육 방식은 늘 ‘통제’에 가까웠다. 그녀는 아이의 감정보다 행동을 먼저 바로잡으려 하고, 문제가 생기면 “왜 그렇게 행동하니?”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는 이해가 아닌 두려움이 자리한다. 싱글맘으로서 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리는 감정보다 버티는 법을 먼저 배웠고, 그 불안은 결국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행크의 분노는 돌봄 받지 못한 감정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행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훈계나 해결이 아니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주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베시가 처음으로 건넨다. 베시는 행크의 반항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의 불안 속에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읽어낸다. 그리고 어느 날, 베시는 행크에게 차 키를 건네며 운전을 맡긴다. 그건 신뢰의 표현이자 “널 믿어.”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차를 타고 함께 모래사장을 내달리며 환하게 웃는 그 장면에서, 각자의 이유로 힘들었던 두 사람의 마음에는 처음으로 상호 치유의 기운이 흐른다. 그 짧은 질주 속에서 행크는 처음으로 통제가 아닌 신뢰 속에서 존재를 인정받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경험은, 그 어떤 훈육보다 강력한 치유가 된다.

행크의 변화는 결국 관계의 복원에서 비롯된다. 리의 통제는 두려움에서, 베시의 돌봄은 이해에서 출발한다. 그 차이는 바로 ‘사랑의 기술’의 차이다. 베시는 기다릴 줄 알고, 리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결국은 행크를 통해 사랑을 다시 배우는 사람들이다.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 정서적 회복과 화해의 순환

리가 베시의 가발을 정리해 주는 순간, 오랜 침묵 끝에 두 자매의 관계가 비로소 열린다. 베시에게 가발은 병을 감추기 위한 도구이자 존엄의 상징이었고, 리에게도 죄책감과 불안을 가리던 보이지 않는 가면이 있었다.

언니의 가발을 정리하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의 가면을 벗는 행위이기도 하다. 말보다 손의 온기가 먼저 닿으며,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때 돌봄은 일방향이 아니라 순환의 형태로 바뀐다. 평생 누군가를 돌보던 베시는 돌봄을 받는 사람이 되고, 리 또한 돌보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그 장면은 사과나 용서보다 더 깊은 정서적 화해의 순간이다.

베시는 다시 아버지의 침상에 함께 기대어 누워 손거울을 들어 벽에 빛을 비춘다. 그녀는 여전히 누군가의 어둠 속에 작은 빛을 남기려 한다. 그 빛은 이제 더 이상 타인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조용한 사랑의 언어다. 처음의 빛이 ‘돌봄의 시작’이었다면, 마지막 빛은 돌봄의 순환이자 내면의 평화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그 빛이 남긴 잔잔한 울림 속에서, <마빈의 방>은 관계의 치유가 완성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 심미안의 시선

<마빈의 방>은 조용하지만 깊은 영화다. ‘마빈의 방’은 단순히 병든 아버지 마빈이 머무는 방이 아니다. 그곳은 가족의 사랑과 죄책감, 돌봄과 고독이 얽혀 있는 마음의 방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지치고, 때로는 용서하며, 끝내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마빈의 방>은 가족들의 거창한 화해 대신, 손끝과 눈빛으로 이어지는 조용한 사랑을 그린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 이해가 남긴 온기가, 삶의 끝에서도 우리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베시가 아버지를 위해 보여주던 반짝이는 거울 빛의 여운이 떠오른다. 빛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그 안에는 모든 사랑이 담겨 있었다. 베시는 말 대신 빛으로, 손끝으로, 눈빛으로 사랑을 전했다. 용서도 돌봄도 어쩌면 누군가의 어둠 속에 아주 작은 빛을 비추고, 그 빛이 사라지기 전까지 조용히 곁에 머무는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마빈의 방>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화해하고 있나요?”

['마빈의 방' 스틸 컷, 사진 = 미라맥스]

■ 다음 연재 예고

다음 연재에서는 피터 패럴리 감독의 영화 <그린북(Green Book)>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인물이 이해와 존중, 그리고 우정을 통해 성장해 가는 관계의 심리를 살펴볼 예정이다. [영화 심리 칼럼니스트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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