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동을 덧그리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10-14     송용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기록될 만한 전폭적인 자본을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작가’ 폴 토머스 앤더슨의 색채를 잃지 않았다. 끈질긴 캐릭터 연구, 고유한 편집 리듬, 리드미컬한 음악 등 앤더슨 영화에 기대하는 요소들이 온전히 담겼다. 더 고무적인 건 앤더슨의 ‘새로운’ 영화라는 확장적 감상까지 (이번에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인데, 장르를 융합하는 솜씨가 무엇보다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집요한 추적과 그에 따른 전략 공방에서 우러나오는 서부극적 서스펜스, 혹은 부조리한 상황을 비트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엉뚱한 유머. 영화 독해 수준을 막론하고 (거의) 누구에게나 몰입감 있는 추동력을 이 영화가 선사하는 건, 두 장르가 적절히 배합돼 각자의 고유한 그 매력을 유감없이 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웨스턴과 스크루볼 코미디는 약 20세기 중반까지 유행했고, 오늘날엔 다른 현대식 장르로 변주돼 요소적으로만 잔존하는 고전적인 장르다. 이 영화의 촬영에 사용된 비스타비전 35mm 역시 이제는 옛것의 향취를 더하는 포맷이 되었다. 말하자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선조 격 되는 20세기 영화들이 취했던 요소들을, 세대를 건너뛰어 21세기 안으로 흠씬 끌어당겼다. 이런 특징은 내용상에서도 발견된다. 이 영화는 반정부 단체 ‘프렌치 75’가 와해되고 16년 뒤, 지금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현대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따라서 프렌치 75는 러프하게 계산해도 2000년 이후 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작 그들의 투쟁 방식에서 그대로 읽히는 건 1960~1970년대 미국 시대상이다(퍼피디아(티야나 테일러)의 비니에 프린팅된 ‘샌프란시스코’ 문구도 동일한 시기의 히피 운동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는 그런 시류적인 괴리 속에서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클로즈업 숏을 무수히 비춘다. 밥의 감정선이 결국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영화가 각양각색의 20세기 것들을 온통 어색하게 입고 있는 건, 철 지난 붉은색 체크무늬 롱 셔츠를 좋아하는 밥의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혈관에는 혁명과 투쟁의 욕망이라기보다 모성애를 닮은 부성애가 흐른다. 딸 윌라와 하나씩 나눠 가진 추적기 챙기는 일을 첫째로 암기해 둔 밥은, 여느 아빠들처럼 딸을 위해서만큼은 슈퍼히어로 혹은 에단 헌트가 되고 싶어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밥의 아내 퍼피디아도 밥만큼이나 자주 클로즈업된다. 하물며, 달리고 있는 퍼피디아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에서 첫 번째 숏을 차지하기까지 한다. 육아와 혁명에서 전자에 몰두한 사람이 밥이라면, 퍼피디아는 후자다. 밥은 세상을 바꾸러 나가려는 윌라에게 육아와 혁명 사이의 딜레마를 던진다. 하필 은행에서 일을 그르치는 모습으로 보아 퍼피디아는, 자발적으로 딸을 방치했다기보다 무지 탓에 혁명의 물살에 못 이겼음에 가깝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로운 혁명이었는가?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 혁명을 구동하는 건 사사로운 욕망들뿐이다. 혁명을 내건 자들은—혁명가라 하기 민망한 밥을 제외하고—모두 예외 없이 성욕을 해소하거나 세계에 대고 자기 이름을 부르짖기 급급하다. “널 체포하는 일엔 관심이 없어.” 스티븐(숀 펜)의 말에서 알 수 있듯 혁명을 진압하는 쪽도 마찬가지다. 노크 암호랍시고 「징글벨」을 두드리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명칭부터 얼마나 유치한가. 결국 이 영화가 바라보는 미국의 1960~1970년대는, 그릇된 욕망들이 진영과 명분을 막론하고 얽히고설킨 야만스러운 시대였으며, 오늘날엔 혁명이라는 허울로 이내 뒤덮여 기성세대의 가식을 비밀리에 품고 있는 것이다.

훌륭한 액션 시퀀스는 눈요깃거리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기성세대의 실패한 혁명 속에서 태어난 윌라는 밥이 아닌 스티븐의 피를 물려받은 존재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윌라만을 보고 살아온 딸 바보 밥, 그가 유전자 검사 키트에 나타난 띄엄띄엄한 직선들을 보았다면 어떤 마음을 내비쳤을까. 실패한 혁명가로서, 또 실패한 아버지로서 밥은 끝내 딸을 향한 곡선을 그려간다. 영화 후반 카 체이싱 시퀀스에서 윌라의 궤적 또한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이루어진 언덕들을 그린다. 때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엇갈리고야 만다. 카 체이싱 시퀀스가 마무리된 순간, 밥이 그려온 곡선의 사랑은 끝내 윌라에게 닿고, 세대를 관통한 혁명의 유일한 성취로 남는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스티븐과 밥은 각각 ‘female’과 ‘girl’이라는 단어를 윌라에게 부여한다. ‘female’은 생물학적 성별만을 지시하는 반면, ‘girl’은 발화자와의 관계 등 맥락에 따라 대상을 더욱 풍부하게 해설한다. 즉 ‘girl’은 대상을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이원화하지 않는 발화자의 다채로운 시선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자면 ‘female’은 직선의 단어고 ‘girl’은 곡선의 단어다. 직선을 그리는 건 간편하고 곡선을 그리는 건 정성을 요한다. 곡선에 깃드는 정성이라 함은 기어이 ‘사랑’이다. 윌라가 파티에 떠나기 전, 밥과 윌라는 일상이라는 듯 작은 다툼을 일었지만, 두 사람은 헤어지기 전에 꼭, 잊지 않고 그날도 사랑을 말했다. 마약과 불안에 찌들어 살아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우리 아빠를 윌라는 사랑한다. 내 핏줄이 아니어도 한 번 내 딸은 영원한 내 딸, 윌라를 변함없이 밥은 사랑한다. 욕망의 좌천을 반추하며 어디선가 내달리고 있을 퍼피디아 역시, 변함없이 우리 딸 윌라를 사랑한다. 세 사람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파동을 휘황찬란하게 그려 내고 있다.

애처로운 사실이지만, 밥은 윌라에게 한 번도 유용하질 못한다. 휴대폰 충전 하나에 쩔쩔매고, 온전히 기억하는 암구호라곤 없으며, 기껏 탈출시켜 놓았건만 옥상에서 다시 떨어져 붙잡히기나 하고, 차 안에서 맥주캔을 내보이는 부주의함 따위로 경찰에게 뒤쫓기기나 한다. 그런 밥이 윌라에게 항상 몇 발씩이나 늦어도, 윌라가 밥 도움 없이도 완강한 승리를 이루어 낼 수 있어도, 윌라에게 중요한 건 지치지 않고 내달리는 밥의 간절한 사랑이다. 밥이 한평생 그려 넣은 곡선된 사랑이야말로 윌라에게, 무채색의 직선밖에 모를 스티븐 일당을 파훼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전해지지 못한 퍼피디아의 사랑과, 전해졌음에도 표면적으로 오독된 밥의 사랑이 있다. 이미 실패한 혁명이 있고, 실패하지 않길 누군가가 소망하는 또 다른 혁명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걱정하는 이의 사랑은 이렇게 변주되어 온전히 전해진다. “조심히 다녀와라!” 걱정 받는 이의 사랑은 이렇게 적확히 표현된다. “싫어요!” [객원 에디터 송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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