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세 인물을 조명하는 알레고리적 빛의 층위

2025-10-03     박하나
['버닝'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버닝〉은 제목처럼 타올라(Burning) 사라진다. 결말에서 종수(유아인)는 벤을 살해한 후, 그의 외제차에 탈의한 자신의 옷을 함께 태운다. 그렇게 유(有)의 세계는 화염을 거쳐 무(無)가 된다. 나체의 종수가 떠나면, 공터에 가까운 희멀건 파주의 논밭에는 녹아내린 고철 덩어리,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벤 만이 남을 것이다. ‘무엇이 있었으며, 있었던 것은 맞는지’조차 불확실한 공동(空洞)의 세계로 들어서면 관객은 이지선다의 골머리를 앓는다. 종수의 살인은 소설일까, 실재일까. 이를 파헤치기 위해 우물, 고양이, 비닐하우스 등의 메타포를 읽으려 애쓰지만, 〈버닝〉은 정답 없는 시험지다. 우물은 실재했을까, 이 난제는 ‘보고 듣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처방약으로 귀결된다. 영화의 주제는 형식적으로는 ‘공동(空洞)’이고, 심리적으로는 무력감, 허무함, 외로움이다.

다시 제목을 들여다본다. ‘버닝(Burning)’을 생각하면 ‘빨간색’이 떠오르지만, 영화의 지배적 색채는 주인공 종수의 색인 ‘파란색’이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인터뷰에서 ‘주로 자연광을 이용해 촬영했다’고 밝혔다. 자연광을 사용했지만, 홍상수 감독처럼 ‘그때 거기 있던 것’을 담는 리얼리즘 영화라는 건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가 귀납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면, 〈버닝〉의 고유성은 완벽하게 계산된 연역적·인과적 복잡함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메타포가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헤드라이트’라면, 영화에 쓰인 빛과 색채는 ‘소프트 라이트’로써 세 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조명한다.

['버닝'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종수를 논하기 전, 버닝 그 자체인 인물 해미(전종서)에 주목해야 한다. 후반부에는 흔적조차 사라지는 그녀는 타올라 자멸하는 석양의 색을 닮았다. 해미는 삶의 이유를 찾기보다 이유 없음 자체를 망각함으로써 살아가는 ‘리틀 헝거’이자, 동시에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그레이트 헝거’다. 석양은 그녀의 알레고리다.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던 해미가 빨강·하양·파랑의 삼원색 하늘 아래 춤추는 장면은 세 인물의 관계를 응축한다. 석양은 또한 곧 다가올 밤에 잠식되는 ‘과도기의 색’으로, 그녀가 사라질 운명을 예고한다.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닮은 석양은 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암시하는 징후이며, 동시에 후반부 눈밭 위로 흐르는 벤의 피와 이어져 분노와 파멸의 기폭제가 된다.

석양을 잡으려면 못 해도 저 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수는 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빛 한 점도 들지 않는 심해 같은 삶에서 허우적대는 ‘파란 인물’이다. 파주 집 내부는 어지럽고 축축한 파란색이고, 새벽녘 논밭과 도로는 남색에 가깝다. 비닐하우스를 순찰하러 뛰어다니는 시퀀스에서 종수는 파주에 염색된 파란 인간처럼 보인다. 영화적으로 파란색이 쓰이는 방식은 다양하다. 다만 종수의 파란색은 일반적인 영화적 상징과는 다소 대비된다.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파란색이 이성과 정상의 범주라면, 〈버닝〉의 파란색은 비이성·비정상적인 아버지의 잔재다. 탈옥할 수 없는 열린 감옥으로써, 도약을 허락하지 않는 파주의 색은 잔인하다. 크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가 ‘상실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가는 파란색’인 반면, 〈버닝〉의 파란색은 ‘지속될 갑갑한 현재의 발로로서의 검은 바다’다.

['버닝' 스틸 컷, 사진 = CGV 아트하우스]

그의 빛은 거짓된 ‘반사광’이기도 하다. 해미의 집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되는 빛이 들어온다. 종수는 그녀와 섹스할 때, 또 자위할 때 모두 남산타워를 본다. 남산타워는 그에게 이상이자 구원이며, 해미 그 자체다. 그러나 햇빛은 해미의 집을 비춘 적이 없다. 남산타워에 비친 반사광은 ‘이상이 창을 열고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허상에 불과하며, 실재하는 그 무엇도 그들의 삶에 들어온 적 없다. 고로 후반부, 남산타워를 보며 소설을 쓰는 종수는 끝까지 환영을 향해가는 공각(空殼)이다.

처절히 전사하는 붉은 노을의 해미도, 순찰을 빙자한 노역을 반복하는 종수도 거뜬히 튕겨내고야 마는 인물이 있다. 벤의 빛은 해미와 종수의 생명력을 모조리 반사한다. 정돈된 저택의 따뜻한 노란 조명과 하얀 미술관에서의 단란한 가족 식사가 그의 세계다. 그는 얼룩진 색을 갖는 대신, 아무런 색도 갖지 않음으로써 우위를 점한다. 그럼에도 벤과 친구들을 둘러싼 노란 조명과 해미의 춤을 장식하는 노을빛이 닮은 것은, 이들이 공유하는 삶이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재미를 추구하는 까닭도 무의미에서 비롯된다. 종수와 벤은 어떨까, 살인은 종수와 벤의 세계가 충돌하는 대목이다. 종수는 깜깜한 밤이 아닌 ‘연푸른빛’을 띄는 동트는 새벽녘, 눈 쌓인 논밭에서 벤을 죽인다. 고로 종수는 그것이 소설이든, 사실이든 간에 그의 색에 짙은 색을 남김으로써 처절한 복수를 행한 것이다. 인물들의 빛은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며 타오르고 이윽고 까만 재가 되어 스크린 앞에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객원 에디터 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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