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를 위한 낙원은 없다, '어쩔수가없다'
만수(이병헌)는 제지 회사 ‘태양’으로부터 갑작스럽게 해고된다. 만수 가족의 화목함으로 들어찼던 첫 번째 시퀀스가, 공장 기계의 물보라로 디졸브되어 단번에 씻겨 나갈 때부터 이는 예견되었다. 아들 시원(김우승)의 말마따나 장어가 뱀으로 둔갑해서 돌아온 형국이다. 60초를 셀 때조차 0부터 카운트‘업’하길 바랄 정도로 내려가는 일을 꺼리는 만수가, 한순간에 녹‘다운’되어 재취업을 염원하는 백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상황을 조금 다듬어서 표현하면 ‘만수가 뱀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났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수’ 대신 ‘아담’을 넣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지 않나. 이후 만수가 마당에 ‘사과’나무 심는 행위로부터, 잃은 낙원을 새롭게 재건립하려는 발버둥을 읽어 내도 결코 무리가 아닐 이유다.
박찬욱은 ‘순환’이라는 테마를 반복적으로 제시해 왔다. 그에 대한 탐구 정신이 특히 집중됐던 2000년대에, 주로 온갖 인물들에게 윤리적인 딜레마를 덧씌우는 설정을 경유하면서였다. 이 영화는 더욱 풍부하게 순환을 형상화한다. 태양이 나무를 생장시키고, 나무는 다시 ‘태양’ 제지 공정의 원료가 된다(태양이 나무를 키우고 나무가 ‘태양’을 키운다). 만수는 시조(차승원)의 시신을 우로보로스처럼 만들어서 묻어 버린다. 「고추 잠자리」 소동극에서 만수와 아라가 거꾸로 맞대고 나뒹구는 액션 구도도 유사한 형태다. 누워서 온 힘을 끌어모아 위로 뱉은 범모의 가래침은 다시 범모 얼굴에 떨어지고, 시원과 리원(최소율)은 앞뒤로 왕복하는 그네를 즐겨 탄다. 카메라는 빈번히 배우를 둥글게 감싸안는 식으로 이동하며 인물 주변에 원을 그려 넣는다.
곳곳에서 순환이 성한 만수의 소동극을 추동하는 구심력은 ‘가족’으로부터 나온다. 만수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되뇌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온 마음으로 나를 지지해주길 바라는 주문만을 달달 왼다. 하지만 그런 만수보다도 오히려 미리(손예진)야말로 집안의 기둥처럼 보인다. 아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업 자체보다는 실업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단 사실을 미리는 이미 미리 안 달까. 기절초풍할 실업 소식을 듣고도 남편부터 위로하는 깊은 사려를 지녔고, 소비의 우선순위를 철저하게 매기는 모습을 보면 필요할 때 사뭇 냉정하지만, 남편과 춤추는 걸 그저 좋아하여 순수하고도 사랑스러운, 서래(탕웨이)만큼이나 꼿꼿한 인물이기도 하다.
만수는 ‘어떻게든’ 올라가려 하고, 미리는 ‘기꺼이’ 내려가려 한다. 미리가 60초를 카운트다운할 때 카메라는 포옹하는 두 사람으로부터 달리-아웃하는 한편, 만수의 요청대로 카운트 업할 땐 다시 두 사람을 향해 달리-인한다. 만수가 선출(박희순)을 땅에 심은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카메라가 만수를 아래에서 위로 훑고, 미리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서 두 사람의 영상통화가 연결된다. 벌컥벌컥, 만수가 식도 아래로 들이키고 있음에도 불구, 맥주잔 속에서 중력을 거스르고 그 자리에서 멀쩡히 흐르는 폭탄주 숏은 하강을 거부하는 독창적 이미지 자체다. 그러나 만수의 상승 욕구들은 거듭 좌천된다. 카메라는 만수보다도 더 높이, 높이 올라가서 매번 부감 숏으로 모든 걸 내려다본다.
그런 만수가 제지 회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지난 25년의 경력 때문이다. 동일한 처지의 범모가 “어쩔 수가 없다”라며 자조했을 때, 만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실업이라는 재앙 앞에서 어디까지 내몰리는지 지켜보게 되고,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헛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범모와 시조의 죽음은 특히 더 그렇다. 살해라기보다 우발적인 충돌에 가까운 순간들이며, 만수 입장에서는 차라리 “어쩔 줄을 모르겠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러나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범모와 시조의 죽음을 헛되이하지 않으려는 듯, 선출을 처리할 때는 한층 능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치아까지 챙기는 그의 태도는 이제 제법 ‘솜씨’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경찰이 몰라도 눈치 빠른 미리만큼은 이 남자의 속내를 이미 다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페이소스는 의외로 만수가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며 갈등하는 미리의 내면에서 깊게 흘러나온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만수의 명분 앞에서, 그녀는 어디까지 눈 감아야 할까.
남편이 실업을 의연하고 융통성 있게, 무엇보다도 가족과 함께 이겨내길 바라는 미리의 소망은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않는다. 끝까지 제지 회사의 문만 두드리며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외로움을 고집하는 만수다. 이런 만수를 두고 ‘보수적’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사람이 두드려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괜히 한 번 직접 두드려 보는 그는, 변화하는 시대상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회피적인 인간 군상을 드러낸다. 실상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곤 로봇(님)들의 앞길을 비켜주는 것밖엔 또 없지 않나. 물거품이 되기 싫은 만수는 손을 뻗어 여전히 허우적대고만 있다. 그에게도 이제는 수염이 났으니, 곧 아날로그라는 동아줄이 끊어지리라는 사실을 정말로 알려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쩔수가없다〉의 주안점은 시대와 시대 사이의 경계 자체다. 20세기 베트남 전쟁과 석유 파동이 21세기 영화 안에 짧게 호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태동하던 그때 그 무렵과, 디지털이 완연해진 지금 이 무렵이 희미하게 겹쳐 포개지고 있지 않나. 이 영화는 시대가 궤적을 비트는 변곡점을 확대해서 ‘사라지고’ ‘살아지는’ 인물들을 결국 스케치하고 있다. 사라짐과 살아짐은 한 끗 차이다. 만수처럼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라고 내세울 수 있는 편협한 병사만이 전쟁으로부터 운 좋게 그저 살아진다.
물론 살아진다고 해서 사라져 마땅한 건 아니다. “식물인간이잖아, 너.” 미리가 만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쩔수가없다〉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은 단연코 ‘나무’일 것이다. 나무는 베어져 종이가 된다. 스마트폰 액정을 어색해하는 아날로그 사람들에게 주로 쥐어진다. 그중 몇몇은 사라진다. 나무는 그 위에서 다시 살아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바라보는 ‘시대 교체’란, 무수한 사람들이 낙원을 잃어 사라지고, 살아진 이들이 마침내 해악을 밟고 땅에 서는 일, 그 순환이 한차례 지나가며 완성되는 것이다. 잔인한 비극이라기보다 지독한 자연에 가깝다.
디지털 기술도 언젠가 다른 존재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 살아지지 않고 무궁히 사는 것들, 변하지 않는 것들에게 인간이 집중해야 할 분명한 까닭이다. 삽질하는 만수를 걱정하며 잠에서 뒤척이는 미리처럼 말이다. ‘어쩔수가없다’는 감탄사는 바로 미리 방식대로 써야 할 말이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니까, 어쩔수가없다!” [객원 에디터 송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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