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이답게 존재할 수 없는 순간에 대하여, '안경'
한국 단편영화는 일상의 작은 사건을 통해 사회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에 익숙하다. 가족, 학교, 또래 집단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나 현장이 장르적 실험보다 더 자주 호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규원 감독의 첫 연출작 〈안경〉은 그러한 전통 속에 서 있으면서도, 단순한 문제 제기나 사회 고발의 차원을 넘어 아이들의 섬세한 심리를 응시한다. 영화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비평적 관심을 끌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초등학교 5학년 하늘은 새로 맞춘 안경을 집 안에서 잃어버린다. 그의 엄마는 무료 방과 후 공부방을 운영하는데, 보육원에 사는 청소년들이 매일 저녁 이곳에 모여 공부한다. 하늘은 사라진 안경을 찾는 과정에서 담배를 피우는 예준과 건우를 발견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안경을 잃어버린 소동에 불과하지만, 그 사건은 곧 하늘의 존재감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경험으로 확장된다. 안경은 단순한 시력 보정 도구가 아니라, 하늘이 자신을 세상 속에서 ‘보는 방식’이자, 타인에게 ‘보이는 방식’을 상징한다. 아이의 세계에서 물건의 상실은 곧 자아의 균열이다. 영화는 안경을 매개로 하늘이 엄마의 관심, 또래 속 위치, 자신만의 자리를 확인하려는 모습을 담아낸다.
영화 속 아이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어른의 방식을 강요받는다. 하늘은 엄마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 하지만, 공부방을 오가는 아이들과의 경쟁 속에 늘 그 관심을 나눠야 한다. 예준은 담배를 피우며 어른 흉내를 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하늘의 엄마의 관심을 신경 쓰는 인물이다.
결국 두 아이 모두 선택지를 강요받는다. 투쟁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어른 흉내를 내며 억지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온전히 ‘아이답게’ 존재할 수 없다. 〈안경〉은 성장 이전에 이미 성숙을 강요받는 아이들의 불안과 결핍을 드러내며, 이 시대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압축한다.
〈안경〉의 미학은 절제와 담담함에 있다. 과장된 드라마적 장치 대신, 일상의 리얼리즘을 통해 긴장감을 끌어낸다. 색채와 조명 또한 절제되어 있다. 일상적인 음향 설계는 과도한 극적 효과를 피하면서 현실성을 강조한다. 편집 역시 빠른 전환보다는 사건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며, 아이들의 내적 동요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만든다. 이 담백한 리얼리즘은 단순히 영화적 선택이 아니라, 아이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하려는 윤리적 태도로 읽힌다.
오늘날 한국 독립/단편영화는 종종 전형성의 비판에 직면한다. 청소년, 소수자, 가족 문제를 일상 서사로 풀어내는 작품들이 반복되며, 연출적 관습마저 사실적 소재의 일상적 묘사, 느릿한 편집 같은 패턴으로 고착화되었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러한 선택은 ‘독립영화'다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일 수 있으나, 지나치게 반복되면서 다양성을 상실해버린 것이 문제다.
〈안경〉은 이 전형적인 궤적 안에 놓이면서도, 미묘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불평등이나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대신 ‘안경’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매개로 아이들의 내면 심리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사건의 표면은 단순히 안경을 잃어버린 소동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이들이 성숙을 강요받으며 자리를 인정하고 포기하는 복잡한 현실이다. 이는 기존의 사회 고발적 단편영화가 놓치기 쉬운 섬세한 정서를 담아낸다.
다시 말해, 〈안경〉은 흔히 ‘독립영화적 소재’라 불리는 청소년 서사 속에서도, 자기 자리와 존재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한다. 이는 단순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묘사하는 데서 나아가, 성장과 상실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안경〉은 결코 화려하거나 과감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첫 연출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고 성찰적이다. 안경이라는 작은 사물을 매개체 삼아 아이들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규원 감독의 시선은 섬세하다.
아이들은 아직 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에게 너무 이른 선택과 포기를 요구한다. 하늘이 잃어버린 것은 단지 안경이 아니라, 아이로서 누려야 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안경〉은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관객에게 여러 질문과 나름의 인간적 해답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심규원 감독의 첫걸음이자, 한국 단편영화가 앞으로 다시 어떤 방향성을 모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이기도 하다. [편집장 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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