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일함을 깨뜨리는 과잉의 뚝심,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
한국 단편영화의 영역은 언제나 실험과 모험의 무대였다. 산업적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만큼, 장르의 혼종과 기발한 상상력이 뿜어져 나오는 곳도 단편이다. 전아현 감독의 2025년 작품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는 그 자유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제목부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대놓고 오마주한 이 심상치 않은 영화는 모험, 코미디, 공포, 판타지, 음악이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를 동시에 붙잡고 25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서 격렬하게 뒤섞는다. 관객에 따라 과잉된 형식과 인물들이 때론 산만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 과잉 자체가 영화의 존재 이유이자 매력이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메탈밴드 ‘아이언퍼피’의 몰락이다. 무대를 뜨겁게 달구던 공연 중, 보컬 겸 베이시스트 정철의 머리카락이 화염에 휩싸이며 불타버리는 사건 이후, 밴드는 더 이상 관객을 불러모으지 못한다. 밴드의 추락은 곧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무대 위에서 관객의 에너지를 먹고 살아가는 이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 즉 자신들을 관통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메탈의 신 ‘오지는 오스본’이다. 그는 이들에게 처녀귀신의 머리를 구해 공연을 하라는 기이한 요구를 한다. 아이언퍼피는 그 요구를 수락하며 블랙홀을 향한 모험길에 오르고, 여정 속에서 온갖 귀신들과 조우하며 자신감을 다시 충전해 나간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우스꽝스럽지만,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는 만화적인 연기와 과장스러운 연출, 빠른 템포의 편집으로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영화의 세계관 속으로 몰입시킨다. 특히 초반부 밴드 공연 장면은 번쩍이는 무대 조명과 락 음악, 그리고 이를 줌 인과 줌 아웃을 활용한 셰이키 캠 방식의 카메라워크로 잡아내어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또한 중반부 게임 라운드 형식처럼 상대방과 대결을 펼치거나, 우스꽝스러운 미션을 수행하는 부분, 효과음이나 자막 등은 자칫 엇나갈 수 있는 영화의 톤앤매너의 중심을 다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는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설정을 통해 정체성과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귀신은 단순한 공포나 퀘스트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불안, 예술가로서 길을 잃을 때 찾아오는 자기 의심의 형상화다. 관객을 휘어잡는 락커의 긴 머리와 사람을 홀리는 처녀귀신의 긴 머리는 닮아 있다. 두 존재는 모두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을 상징하며, 영화는 그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공허를 환기한다. 결국 아이언퍼피의 모험은 외부의 적과 싸우는 서사가 아니라, 스스로를 반추하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형식적으로도 영화는 '잡식성’에 가깝다. 2.39: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펼쳐지는 실사 장면 속에 돌연 1.85:1 애니메이션이 삽입된다. 추가적으로 후반부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는 영화의 호흡을 뒤흔들고 관객의 몰입을 깨뜨릴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진 연출 방식이다. 그러나 이 파열은 의도된 것이다. 현실과 판타지, 귀신과 락커가 경계를 허물며 뒤섞이는 지점을 시각적으로 각인하는 장치다. 메탈 음악 특유의 과잉된 에너지와도 정확히 호응한다. 장르 영화로서도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는 다소 급작스럽더라도 이를 무르지 않고 과감하고 뚝심 있게 전개해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현재 한국 독립/단편영화의 주류적 흐름과는 분명히 궤를 달리한다. 지금 한국 독립/단편영화 생태계는 정체와 고착 상태에 빠져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업영화와 독립/단편영화 사이의 나름의 관계가 있었고, 독립/단편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감독들이 상업영화로 진출하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선순환 구조도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선순환이 여러 상업적 실패로 인해 무너진 지 오래다.
더 큰 문제는 독립/단편영화계 내부다. 과도한 아마추어리즘을 답습하는 저예산 습작들이 ‘독립영화스럽다’ 혹은 '단편영화스럽다'는 명목으로 재생산되고 독립/단편영화계 안에서만 반복적으로 소비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청소년, 여성, 소수자 등의 소재를 기반으로 일상 서사로 묘사하는 드라마나, 정치/사회적 소재를 프로파간다가 연상될 정도로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연출 방식 또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의 유명 감독들에 영감받아 느린 템포의 편집 방식으로 전개하는 관습적 패턴에 갇혀 있다. 물론 이것들이 잘못된 연출 방식이나 소재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출 방식이나 소재가 전형화된 채로 너무나도 많은 작품에 과하게 사용된다는 점은, 다양성을 기치로 내건 독립/단편영화가 오히려 상업영화보다 편협하고 획일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는 신선한 충격이다. 이 영화는 독립/단편영화가 여느 다른 단편영화와 유사한 ‘소재’와 ‘이를 다루는 태도’만으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안일함을 거부하고, 장르적 과잉과 형식적 실험을 통해 독창성을 추구한다. 청소년, 여성, 가족, 사회적 약자를 반복적으로 호출하거나 창작자 본인의 경험을 얕게 투영하는 습작의 차원을 넘어서, 메탈 음악이라는 한국 독립/단편영화 문법에선 드물게 다루어진 소재를 전면에 배치한다. 그 안에서 코미디와 판타지를 교차시키며, 불안과 확신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새로운 음악적 연출로 끌어낸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현재 한국 독립/단편영화의 전형과 거리를 두고, 오히려 그 전형을 비트는 데 성공한 드문 사례다.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밴드를 위한 안내서〉는 모두에게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단편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들 중 하나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는 충실하다. ‘나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은 밴드 아이언퍼피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전아현 감독 자신이 창작자로서 끊임없이 던지고 있을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정철이 긴 머리카락을 관객에게 집어던지는 것은 단순한 판타지 모험담의 마무리가 아니라, 자기 불안과 대면하려는 청년 영화감독의 진솔한 모습처럼 느껴진다.
한국 독립/단편영화의 다수 작품들이 안일한 자기복제에 머물고 있을 때, 전아현 감독은 장르적 과잉과 실험적 소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그 가능성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의 성취로 그치지 않는다. 지금 한국 독립/단편영화가 다시금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 계기이기도 하다. 락커로서 처녀귀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찾아 떠나지만, 마지막엔 이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는 아이언퍼피의 여정은 마치 한국 독립/단편영화계에 몸담은 모든 창작자들이 마주해야 할 도전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편집장 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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