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티리얼리스트',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의 낭만적 연애라는 모순

2025-09-27     이혁진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셀린 송이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다. 전작 〈패스트 라이브즈〉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커리어를 시작한 뉴욕을 배경으로 골랐고, 감독 본인이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결혼정보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커플매니저인 ‘루시’를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 서사를 만들어냈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그리고 물리적 거리를 넘나들던 전작과 달리 〈머티리얼리스트〉는 이국적인 향기가 깊게 배어있는 영화다. 그러나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국적인 영화를 전 세계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것은 ‘물질만능주의인 현대사회에서 연애하기’라는 아이러니한 주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루시는 커플 매칭을 원하는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종합해 어울리는 짝을 찾아주는 일을 한다. 그녀에게 매칭을 부탁하는 고객들은 때론 절박하게, 때론 깐깐하고 과도하게 상대방의 조건에 집착한다. 20대 후반의 여성, 성숙해야 하지만 27세보단 어려야 함, 금발, 백인, 클래식한 영화와 옛날 음악에 해박하면서 연봉은 5억을 넘어야 함, 키는 커야 하고 BMI 지수는 일정을 유지해야 함. 무엇보다 외모가 중요함. 과연 이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루시는 터무니없이 과도한 필수 조건들을 들으면서도 그들의 짝을 찾아주려 노력한다. 그건 그녀에게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는 이들이 많은 돈을 들여 커플 매칭에 신청했기 때문이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루시는 매칭 커플의 혼인을 9번이나 성사시킨 능력 있는 커플매니저다. 9번째 커플의 결혼식에 참석한 루시는 결혼식 직전 신부가 결혼을 망설인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 고객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남편이 언니의 남편보다 나은 사람이라 결혼을 하기로 했어요. 언니가 나를 질투한다는 사실과 언니보다 낫다는 우월감 때문에요.” 사실은 남편에 대한 순수한 사랑보다, 경쟁심을 느끼던 언니의 콧대를 누르고 싶어 돈도 잘 벌고 외모도 훌륭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루시는 이런 물질주의적 결혼 사유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그는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 주네요. 그게 그가 지닌 가치예요.” 신부는 눈물을 그치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식장으로 향한다. 물질주의에서 (아주 작은) 사랑의 단서라도 찾아내는 것. 영화는 이 한 장면으로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커플매니저인지 납득시킨다.

그 결혼식에서 루시는 중요한 두 인물을 만난다. 자신에게 첫눈에 반해 앞으로 구애를 하게 될, 결국은 연인이 될 남자 ‘해리’와 오랫동안 연인이었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헤어진 전 남친 ‘존’이다. 그러나 그 둘은 너무나도 다르다. 해리는 신랑의 형으로, 뉴욕 금융권에서 일하며 160억 맨션에 살고, 180cm가 넘는 키에 훌륭한 외모와 탄탄한 몸을 갖췄으며 매너와 자기 관리까지 완벽한 그야말로 ‘유니콘’ 같은 남자다. 반면 존은 훌륭한 외모를 지녔지만, 수년 동안 무명인 배우이고, 시끄럽고 좁은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들과 같이 살고 있으며, 아직 제대로 된 수입원이 없어 부업으로 그곳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거지 같은 돈’ 때문에 루시와 헤어졌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해리는 루시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매번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고, 수준 높은 대화와 적절한 매너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해리 같은 완벽남이 구애를 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해리에게 루시는 커플매니저 다운 얘기를 한다. 당신 같은 외모, 재산, 학벌, 배경, 인성을 가진 사람이 더 어리고 예쁘고 훌륭한 여자가 아니라 왜 나를 좋아하냐는 것이다. 해리는 그녀가 가진 ‘가치’를 보고 만나고 싶다고 고백한다. 루시의 외모만이 아니라 어른스러움, 세상 물정을 알고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그를 끌어당긴 것이다. 그렇게 루시는 해리와 진지한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해리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녀를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고, 좋은 차에 태우고, 비싼 선물을 준다. 엄청난 부자가 이상형이라던 그녀에게 해리는 완벽할 뿐 아니라 분에 넘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그러나 해리의 160억 맨션의 고급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표정은 복잡 미묘하다. 조금 전 그가 준비한 프로포즈 링을 발견하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머릿속에 그려봤을 것이다. 그 그림은 분명 화려했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삶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남의 가치를 줄줄이 읊던 루시도 정작 자기 가치 앞에서는 쉽게 눈이 멀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나의 가치를 진심으로 알아봐 줄 시선이 필요하다. 해리와의 미래는 그녀가 '원하던 것'일 수 있으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결국 존이 주던, 계산을 거치지 않은 진심이었다.

여기까지가 〈머티리얼리스트〉가 주는 연애의 교훈이다. 물질주의자도 로맨티시스트로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사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연애에 익숙해진 나에게 그것은 아주 와닿는 말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관객이 이 영화의 로맨스에 의문을 가질 것 같다는 확신이었다. 똑같이 눈물을 흘려도 지하철에서 흘리는 눈물보다는 자가용 벤츠에서 흘리는 눈물이 낫다는 말이 있다.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지만, 때론 돈이 행복에 더 가깝게 해 준다는 사실을 비꼬아 얘기한 말이다. 그 말처럼 이 영화를 보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셰어하우스의 좁은 침대에서 옆방 소음에 연인과 깨는 것과, 비싼 맨션의 킹사이즈 침대에서 햇살을 맞으며 깨어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루시의 고민과 선택이 복에 겨운 것이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현대의 로맨스에선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는 게 오히려 어려워졌다. 누구나 알만큼 유명한 재벌 2세 남자와 그가 첫눈에 반한 가난한 여주인공이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얻어낸다는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연애는 순수한 로맨스로만 포장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아니, 사실 원래 그래왔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픽션일지라도 이런 이야기에 속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픽션은 삶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모든 진리 위에 있다는 이야기는 물질주의적 연애에 지친 현대인들을 설득할 힘을 잃고 있다.

이런 면에서 〈머티리얼리스트〉는 또 다른 삼각관계로 유명한 양귀자의 『모순』을 연상시킨다. 소설 속 주인공 ‘안진진’ 또한 두 명의 남자를 두고 인생일대의 고민에 빠진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빈틈없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데이트기계 같은 남자 ‘나영규’와 경제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들꽃을 찍기 위해 여기저기로 훌쩍 떠나는 미스터리한 남자 ‘김장우’. 사실 소설을 읽다 보면 진진이 누구에게 더 큰 호감을 느끼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진진은 핸드폰이 울리자 급하게 연락을 확인하고, 그게 김장우가 아니라 나영규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한다. 그리고 나영규보다 자신에게 늦게 전화를 건 김장우가 밉다고 느낄 정도로 확실히 김장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 그녀는 결국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선택한다. 그녀는 한결같이 나영규를 좋아해 왔다. 단지 김장우에 대한 호감보다는 작았을 뿐이다. 그녀는 김장우와 가난하지만 설레는 연애를 하기보다, 설렘은 덜 하지만 나영규와 안정적이고 여유 있는 연애를 하는 미래를 골랐다. 그녀의 선택은 조금 현실적이다. 그녀는 나영규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마저 인생이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나영규를 선택한 것이 로맨스의 시선에서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현실에서 김장우를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머티리얼리스트〉가 다다른 결론보다 『모순』의 진진이 내린 선택이 더 이해되는 건 나 또한 물질주의적 시각으로 연애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누구도 이런 시각을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난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한 사랑보다는 모두 ‘현실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걸 못하는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최근 국내 방송계를 장악한 수많은 연애, 결혼 프로그램을 보면 〈머티리얼리스트〉 속 커플이 되고 싶어 하는 남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공개적으로 방송이 되기 때문에 속물적인 모습이 있더라도 조금 감추는 정도일 뿐이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의 키, 외모, 재력, 학벌, 배경, 직업 등으로 상대의 가치를 매기고 나와 상대의 가치를 비교해 보며 내 수준에 맞는 짝을 찾는다. 이런 연애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소위 ‘빌런’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너무 과하게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려 하거나, 경제적 능력만 보고 상대에게 다가가는 속물적 면모를 보인다. ‘사랑을 찾는다’는 모토와는 달리 그저 노후를 책임질만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을 낚아채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결혼에는 사랑보다 계약이 앞서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이런 방식을 이질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사랑을 구분하는 데에는 기계적인 산수가 아닌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는 사고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루시는 “결혼은 계약이다.”라는 말을 방어적으로(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한 사랑을 꿈꾸는 고객들의 눈을 낮추기 위해) 사용했지만, 후반부 해리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루시에게 “결혼도 계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되묻자 “맞지만, 그전에 먼저 사랑이 있어야죠.(But love has to be on the table.)”라고 답한다. 루시의 말처럼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다. 다만 루시의 말처럼 사랑이 없다면 그것을 제대로 된 계약이라 할 수 있을까? 모든 로맨스에는 언젠가 부딪힐 현실의 벽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로맨스에는 먼저 그것을 극복할 ‘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머티리얼리스트〉는 이 시대가 간과하는 사랑의 에센스를 왜곡 없이 전달하려 노력한다. 셀린 송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랑에 빠졌는지를 물으면 키, 몸무게, 수입이라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젠가 치킨을 사 왔을 때’, ‘언젠가 우리가 길을 걷고 있을 때 그가 한 농담 때문에’라고 말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불확실하다는 것이죠.”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싶어 출발했다는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이유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소니픽처스코리아]

후반부 모르는 이의 피로연에서 춤을 추는 루시와 존이 비치고, 로맨틱한 스탠더드 재즈곡인 ‘That’s All’이 흐른다. 이 곡의 가사는 이렇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영원한 사랑밖에 없어요. 또 필요할 때 옆에 있어준다는 약속밖에요. 그리고 당신을 향한 내 마음밖에요. 그게 다예요. 그게 다예요.” 이 노랫말은 영화의 종반부 존이 루시에게 하는 고백과도 비슷하다. 〈머티리얼리스트〉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가 아닐까. [객원 에디터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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