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산국제영화제 비평 단상 - 충돌, 유머, 미학, 기억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따가운 햇살과 함께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경쟁부문 초청작인 <충충충(한창록)>, 갈라 프레젠테이션의 <국보(이상일)>, 아시아영화의 창 <암린의 부엌(타니슈타 차테르지)>과 <사이공의 연인(리언 레)>, 마지막으로 리퀘스트 시네마의 <시인들의 창(김전한)>의 조각들을 꿰어 본다.
스크린을 뛰어넘는 결핍의 충돌, 〈충충충〉
〈충충충〉의 오프닝 시퀀스는 사이키델릭한 편집적 요소가 가미된 꿈틀거리는 벌레 떼다. 나비약, 딥페이크, 자살, 온라인 채팅, 가정폭력 등 사회적 문제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는 시도는 물성을 타지 않고 옮겨 다니는 벌레처럼 어느새 스크린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특히 인스타그램 라이브 레이아웃과 인물 필터를 그대로 구현하는 방식은 청소년 자살 문제를 직선적으로 꼬집는다. 영화는 지나치게 현실 반영적인 영화가 선사할 불쾌한 무게감을 용기(주민형)와 덤보(신준항)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완화시킨다. 춤을 추고 틱톡을 찍는 또래다운 방식의 해방 놀이는 ‘충동’적인 아이들이 ‘충돌’해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충충충〉의 로그라인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인공 용기, 지숙(백지혜), 덤보는 각자의 결핍을 안고 산다. 결핍은 우정의 필요조건이자 결속의 매개체지만 그 주인이 설익은 청춘인 탓에 제어장치가 없다. 지숙을 좋아하는 용기는 전학생 우주(정수현)로부터 지숙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영웅놀이에 빠져있다. 그녀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한 부모 가정의 용기는 ‘가장’의 역할을 자조적으로 답습하며 결핍을 해소한다. 어머니는 남자친구와 새살림을 꾸리고 있었고 타지에서 일하며 아들을 보러 오지 않는다. 보호받고, 기대고 싶은 용기의 욕망은 이상화하는 모성적 존재에 역으로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타인(지숙)으로부터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뒤틀린 방식으로 발현된다.
과다 투여된 사랑으로 그의 감정적 빚은 늘어만 간다. 애석하게도 지숙은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른 몸을 동경하며 거식 증세를 보이는 그녀의 수식어는 안쓰러움과 역겨움 모두다. 아버지로부터 오랜 시간 가정폭력을 당한 그녀는 가학적 행위를 일삼는 우주에 집착하고, 용기를 이용하는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를 보인다. 사랑의 결손은 충동적인 방식으로 발현되어 감정의 충돌을 야기하고, 어디로 도달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진폭을 키워가며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단연코 올 한 해 가장 아름다운 영화, 〈국보〉
공포영화의 점프 스케어로 잠 못 이룬 밤을 보낸 적 있을 것이다. 유령이 불쑥불쑥 떠올라 불을 켜고 누울 수밖에 없던 경험은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겪은 흔한 증세다. 그렇다면 단순히 미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적 잔상이 오래 지속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특정 장면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시시각각 떠오르고, 문을 불쑥 열고 찾아와 어느새 그 장면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경험 말이다. 〈국보〉는 예술적 극치에 닿은 이미지의 힘으로 관객들의 감각을 사로잡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초반부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부키 명문가에 편입된 기쿠오(요시자와 료)가 친구 슌스케(요코하마 료세이)와 고된 가부키 연습을 하는 장면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어린 소년들이 파멸과 회복을 반복할 애증의 미래를 목전에 두고 육교에서 가부키 극의 한 장면을 연습하는 씬은 열정만이 찬란히 빛나던 소년의 꿈을 순수하게 담아낸다. 중반부, 좌절과 절망의 진흙탕 같은 굴레는 연꽃이 피기까지의 여정이다. 취객에 희롱 당하고, 슌스케에 밀려 손가락질 당하는 연속된 불행 속 미장센은 불안과 떨림, 위태로움을 담아낸 ‘표정’이다.
엔딩에 이르러, 아버지가 살해된 눈 밭과 예술적 경지에 이른 극의 새하얀 무대 장치의 연결성은 서사를 환상적으로 봉합함으로써 50년에 걸쳐 완수된 고고한 복수의 막을 내린다. 객석에 앉은 우리는 그가 국보가 되기까지 잃은 것과 얻은 것들을 생각하고, 예술과 합일되어 더 이상 셈 따위는 무의미해진 하얀 조명 속 기쿠오를 하염없이 담을 뿐이다. 가부키 극의 아름다움과 예술가의 삶, 그리고 영화의 미학성까지. ‘이중 예술’의 구조적 성취를 스크린에 가득 적신 영화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불행을 껴안는 유머의 힘, 〈암린의 부엌〉
제3자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참극이 누군가에겐 그저 익숙한 하루일 수 있다. 무슬림 여성으로서 고된 경제활동과 가정폭력에 노출된 암린의 삶이 그러하다. 감독은 참극과 일상극의 간극을 좁히는 과정으로서 ‘유머’를 택했다. 〈암린의 부엌〉의 오프닝 시퀀스는 색의 축제다. 분홍, 파란색이 뒤엉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축제에 대비되는 부엌에서 검은 히잡을 쓰고 요리하는 암린이 주인공이다. 친절한 오프닝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그녀가 자신의 색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남편의 다리 부상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암린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지만 히잡 탓에 가정부 일을 구하기 쉽지 않다. 친구의 도움으로 비건 부부 파룰과 비노드의 집에서 일하며 까다로운 입맛과 요리법으로 고충을 겪는다. 설상가상으로 가정 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의 말투와 행동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손찌검을 하기에 이른다. 멍투성이가 된 그녀를 동정하고 싶지 않다. 피해자는 반드시 우울하고 무기력해야 할까? 암린은 종교에 얽매여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모든 것을 감내하는 신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딛고 일어선다. 18년간 함께 살아온 남편의 곁을 떠나는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당당히 벽에 걸고, 히잡을 쓴 채 오토바이 바람을 쐬고, “며느리한테는 히잡 안 씌울게.”라며 아들에게 재치 있는 농담도 건넨다.
어리숙하던 암린은 어느새 먼저 보수를 제시하고, 비건 부부와 비타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훌륭한 조리사로 성장했다. 불행을 사이에 두고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는 그녀의 곁에는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다. 이웃집 친구, 아들, 파룰과 비노드 부부 등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구성도 주목할 점이다. 탄탄한 위계구조를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우리 모두에 내재된 자유를 향한 열망과 가능성의 연대다. 〈암린의 부엌〉은 타니슈타 차테르지 감독이 4기 암 투병을 이어가던 와중에 완성한 작품이다. 작품의 에너지는 타니슈타 차테르지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사랑, 삶을 지속하는 끈적한 집념과 맞닿아있다.
미학적이고 싶었던 영화, 〈사이공의 연인〉
‘이 영화는 아름다운가요?’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화양연화〉가 떠오르는 미장센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알베르 카뮈와 흑백 화면의 전환에 비롯해서 말이다. 단, 이것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라는 말을 덧붙이겠다. 영화는 분명 서사적 독창성을 가질 수 있었다. 배경인 1985년, 베트남은 '변경한다'는 뜻의 도이머이 정책이 도입되기 직전이었다. 1975년 베트남전에서 자유 진영인 남베트남이 패배하면서 베트남은 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통일되었다. 키남의 남편은 남베트남과 연관된 인물로 그려지고, 사회적 검열과 제한이 극심하던 당대의 상황에서 키남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이와 달리 부유한 외삼촌의 지원으로 번역 업무를 하기 위해 키남의 동네로 이사 온 캉은 모두의 환영과 관심을 받는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막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의 외삼촌은 북베트남 진영의 고위 인사로 추정된다. 인물들의 생활과 관계에 정치가 깊이 관여하는 양상에서 당대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베트남’이라는 역사적 배경은 단지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 외적 조건으로만 기능할 뿐, 서사적으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 이사 온 첫날밤, 키남에게 곧바로 매혹되는 캉의 감정은 개연성이 부족하며, 프랑스어라는 낭만적 교집합은 결국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한 편리한 장치에 머문다. 물론 북적이는 시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는 이별 의식은 사회적 제약을 잠시 벗어나 자유를 맛보는 상징성을 지니지만, 결말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일상 루틴은 미장센 전시에 치중하며 서사적 밀도를 희생한다.
당대의 〈어린 왕자〉가 현실에 대한 은유적 저항의 메시지로 기능했다는 점을 의미화할 수 있지만, 사후적인 것에 불과하고 캉은 오히려 외삼촌의 힘에 기댄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서사의 미흡한 공백을 레트로한 미장센과 문학적 장치들에 기대어 그려내지만 기성 영화들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독자적이라 평하기는 어렵게 느껴진다. 오늘날 예술은 새로움을 생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인용하고 패러디 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시(詩)에 대한 고백일까, 장소에 대한 예찬일까 〈시인들의 창〉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서사도 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생각할 때 말이다. 사과를 영화화한다면 그것은 빨간 색채에 아삭한 식감을 가진 단편영화가 될 것이다. 사과는 빨갛고, 아삭거리기 때문이다. 시는 느리고, 도시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인들의 창〉은 1초에 24개의 시를 옮긴 영화다. 엔딩 시퀀스에서 ‘모든 것은 빌려온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는 감독의 고백은 순진하고도 당연한 고백이다. 맨발로 하염없이 산책로를 걷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에 대한 공인된 이미지와 약속된 낭만성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롱테이크와 익스트림 롱샷, 물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 노트북 자판 소리, 시인이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며 시상(詩想)을 찾는 영화에서 인물의 오디오는 거의 전무하다. 이 시(詩) 같은 영화에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오랜 고독을 깨고 낭독되는 시는 개인적·정치적 고통을 겪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8인의 시인에 대한 예찬이다. 이 시는 평화롭고 고요한 영상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영화는 8인의 피를 빌려 시의 고결함과 시인의 고충을 보여주려 했지만, 정돈된 책상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낭만적인 작업을 이어가는 일상의 몽타주들은 연출의 실패다.
〈시인들의 창〉은 김전한 감독이 강원도 횡성의 ‘예버덩 문학의 집’에서 2년 동안 문인들의 창작 과정을 촬영한 작품이다. 해서 나는 이 영화가 시보다는 장소에 대한 영화, 장소애를 그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시를 생각할 때, 더군다나 시인의 고통을 담아낼 때 그곳은 물이 흐르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산책로를 끼고 광활하게 펼쳐진 문학의 집보다는 차갑고 축축한 서울의 반지하가 더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객원 에디터 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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