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자연인’, 기형적 컨텐츠 포화 상태를 향한 냉소
노영석식 코미디
<THE 자연인>은 시작부터 대한민국 창작 컨텐츠 시장을 저격하는, 매우 자극적인 향기를 내뿜는다. 귀식커와 그의 친구 병진춤이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앞으로의 상황을 관통한다. 유튜버인 그들은 자신 스스로를 수식하고 있는 숫자인 구독자 수로서 과시한다. 1000명, 10만과 같은 숫자를 성공의 지표로 삼는 그들의 태도는 자연인이 담근 술로까지 연장된다. 자연인의 술과 유튜버의 컨텐츠를 통해, 노영석 감독은 자신의 전작 <낮술>과 마찬가지로 사회현상을 해학적으로 해부한다.
우선 귀식커와 병진춤라는 이름부터 노영석 감독의 컨텐츠 시장을 비판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우스꽝스럽게 발음을 굴리며 발설한다. 관객들이 그들의 태도를 보며 냉소를 짓는 순간부터, 모두가 감독과 함께 비아냥댈 준비가 됐다고 동의한 것이다.
이런 노영석 감독의 스타일은 <낮술>에서부터 시작됐다. 남자 주인공의 기묘한 여정 중에서 불쾌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모든 웃음의 끝 맛은 술과 같이 쌉싸름한 맛이 코끝을 맴돈다. <THE 자연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쾌를 쾌로 둔갑시키고,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다, 결국에는 코미디로 끝맺는다. 하지만 그 끝 맛은 알 수 없는 쓴맛이 담겨있다.
도파민만을 위한 공급
귀식커와 병진춤은 실존하지 않는, 무형의 것을 찾는다. 이 행위가 그들 스스로도 허황된 것이라 인지한 상태이다. 게다가 대중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단순 돈벌이로 보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단순히 대중들이 원하는 도파민만을 충족시키면 된다는 식이다. 그들이 만난 자연인은 정확히 그들과 같은 태도로 맞이한다.
자연인이 내놓은 음식은 밥과 소금이다. 이는 허기를 달래는 최소한의 끼니일 뿐, 본래의 식사라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식사는 단순 영양 섭취를 넘어 숟가락질과 젓가락질 같은 기본 행위, 그리고 함께 나누며 생기는 정서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들은 식기도 없이 손으로 허겁지겁 집어먹는다. 이는 단순한 끼니 해결이 아니라 ‘먹는 흉내’에 가깝다. 노영석은 이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 대중의 매체 소비 방식을 은유한다. 즉, 출처나 맥락, 진실성은 따지지 않고, 당장의 도파민 자극만 좇는 태도다. 귀식커가 자연인을 이메일 한 줄만 보고 무턱대고 신뢰하는 모습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정보의 불확실성과 불안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정보의 숫자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 정보의 양뿐만 아니라 속도 또한 빨라졌기에, 이 정보가 안전한 정보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매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모든 정보의 안정성을 기관이 판별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개인 스스로가 이 정보의 안정성을 판단해야 한다.
<THE 자연인>은 정보의 부정확성과 불확실성에 의한 불쾌―불안을 반드시 정보에 대한, 인지부터 확인까지인 쾌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예컨대 소금잼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알 게 되는 순간 쾌에서 불쾌로 뒤바뀐다. 이처럼 영화는 정보라는 매개체를 통해 관객들에게 서스펜스를 줄지, 해소를 줄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THE 자연인>의 선택이 언제, 어떻게 제공될지 모르기에 불편한 상태가 유지된다. 관객들의 이 상태를 귀식커가 투영한다. 그는 이 장소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을 갖고 있다. 그 의심이 해소가 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몰라 다시금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귀식커가 자신이 ―꿈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본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쾌 혹은 불쾌라는 완전 전소가 아닌 상태, 즉 의문점으로써 남겨둔다.
이는 우리가 온라인상에서 얻은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감정과 일치한다. 산삼을 발견하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산삼을 캔 것이 자연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 그 순간이다. 오히려 자연인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는 순간, 자신이 오해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처럼 관객들은 반복적인 불편함을 마주하게 된다. ―후에 이 모든 것이 설계였음을 알게 된다― 결국 반복되는 정보의 진위 여부 판단은 피로로 바뀌게 된다. 마지막 식사에서 매생이 죽을 먹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제공되는 음식을 먹지 않던 귀식커가 매생이죽을 먹게 된다. 그것이 매생이가 아닌 하천에서 자란 녹조임을 알게 되어도 그냥 먹는다. 우리는 어쩌다 정보로부터 피로를 느낄뿐더러,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가 빈곤한 상태까지 되어버린 것일지를 고민할 순간이다.
파괴와 허무의 결론
컨텐츠 공급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숫자 따위는 자연인이 가진 술의 연도와 마찬가지이다. 귀식커, 병진춤의 10만 구독자, 100만 구독자와 자연인의 천년산삼, 50년 된 산삼주.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의미 없음을 노영석 감독은 파괴로써 보여준다. 모든 물질적인 자원들을 자연인이 시원하게 볼링공으로 깨뜨린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한마디를 남기면서 말이다.
선조 때부터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술들이 모두 사라지자, 오히려 홀가분해 보인다. 너무 아껴서, 죽을 때까지 한 입조차 마시지 못했던, 그 술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마시지 못할 술이 100년이 되었던, 1000년이 되었던 무슨 소용인가. 마셔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컨텐츠 공급자들이 자극만을 위해 만든, 수단조차 가리지 않고 만든 그 저질 컨텐츠들로 하여금 10만 구독자 100만 구독자를 모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 정보들이 질 떨어지는 쓸모없는 것들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무지한 상태가 반복될 것을 노영석 감독은 시사한다. 귀식커와 병진춤이 자연인의 테이프와 맞바꾼 진리를, 그들이 조작방송으로 각각 15만과 3만 명이라는 구독자를 얻는 순간 과오는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씁쓸한 뒷맛이 노영석 감독의 맛이다. [객원 에디터 이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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