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흥행의 이면
하나의 문화 현상이 탄생하는 데에는 단순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2025년 여름, 극장가를 휩쓴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흥행 신드롬 역시 마찬가지다. 인기 시리즈 극장판의 성공은 대부분 감독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는 단독 작품이거나, 독립적인 오리지널 에피소드에 한정되었다. 원작의 긴 서사 중간을 그대로 옮기는 방식은 흥행 실패라는 불문율에 가까웠다. 〈귀멸의 칼날〉은 바로 그 불문율을 깨뜨렸다. 단순히 ‘원작의 인기’나 ‘뛰어난 작화’라는 표면적 이유만으로는 이 열광을 설명할 수 없다.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크린 내부의 미학을 넘어, 미디어 환경과 동시대 관객의 심리적 결핍까지 아우르는 시선이 요구된다.
실패하지 않는 투자처, 스펙터클의 신뢰 자본
치솟은 티켓 가격 앞에서 관객은 실패 위험이 없는 ‘안전한 투자처’를 찾게 되었고, 〈귀멸의 칼날〉 극장판은 그에 완벽히 부응했다. 이는 제작사 유포테이블이 TVA 시절부터 쌓아 올린 압도적인 퀄리티에 대한 강력한 ‘신뢰 자본’ 덕분이다. TVA의 미학적 성취는 원작의 서사를 증폭시켜 ‘귀멸의 칼날=최고의 퀄리티’라는 신뢰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이 신뢰 자본은 관객에게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고, ‘유포테이블이 구현하는 최고의 스펙터클을 대형 스크린으로 체험한다’는 미학적 욕구는 극장으로 향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신뢰의 거래’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OTT 플랫폼의 보편화는 시리즈의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정주행 후 극장 관람’이라는 새로운 문화는 OTT가 ‘예습 교재’가 되고, 극장판이 ‘이벤트’가 되는 강력한 시너지를 낳았다.
시대의 결핍을 위로하는 비극의 미학
그러나 이 열광의 이유는 스펙터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품의 비극적 세계관이 동시대 관객의 내면적 결핍과 깊이 공명하기 때문이다. 〈귀멸의 칼날〉은 시스템의 부재 속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과잉 책임의 시대’를 비춘다. 귀살대원들의 숭고한 투쟁과 희생은 무한 경쟁에 짓눌린 관객에게 강력한 감정적 동일시를 유발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나아가 이 작품은 세속화된 사회를 위한 정교한 ‘애도의 의식’으로 기능한다. 모든 죽음은 회상과 ‘계승’의 서사를 통해 존중받는다. 전통적 애도 방식이 희미해진 현대 사회에서, 관객은 스크린 속 의식을 통해 안전하게 슬픔을 체험하고 정서적 위안을 얻는다.
한국에서의 수용: 미학과 역사의 길항(拮抗) 관계
한국에서의 수용은 더 복잡한 지형도를 그린다. 이는 작품의 미학적 체험과 내면화된 역사적 기억 사이의 긴장 관계 때문이다. 다이쇼 시대라는 배경 설정이나 주인공 탄지로의 귀걸이 문양은 일부 관객에게 불편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이는 일제 식민 지배기의 기억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 다수는 압도적인 미학적 쾌감과 서사를 역사적 불편함과 분리해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여기에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같은 K-콘텐츠의 세계적 성공으로 인한 문화적 자신감이 더해지면서, 일본 대중문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서 나아가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복합적 태도도 가능해졌다. 결국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신드롬은 예술적 성취와 역사적 불편함을 동시에 감각하는 한국 사회의 복잡한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시대를 담아낸 신드롬이 남긴 것
결국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흥행은 시대적 요구와 미디어 환경 변화가 맞물린 문화 현상이다. ‘스펙터클의 약속’은 관객을 불렀고, ‘숭고한 비극’은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신드롬은 산업적으로 TVA-OTT-극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또한 관객의 측면에서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숭고함과 공동의 슬픔을 나눌 ‘애도의 의식’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좋은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고 싶은 시대의 솔직한 욕망이 바로 이 현상의 본질일지 모른다. [객원 에디터 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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