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략과 응시가 이끄는 폭력성, '엘리펀트'와 '택시 드라이버'

2025-09-04     박하나
[엘리펀트 스틸 컷, 사진 = 동숭아트센터]

윤리적 틀에 사건을 가두고 선악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관객을 매도하는 것은 비극적 사건을 묘사하는 영화들의 잦은 실수다.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의 몰입적 성격은 필연적으로  ‘감독의 의도대로 사고’하는 메커니즘을 양산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선전 영화’는 어쩌면 영화의 일반적 성격을 극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 고전적 문법을 탈피한 영화가 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는 사건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감각적 체험을 선사하고, 감독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윤리적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 또한 주인공 트래비스의 시선과 내적 폭력성을 따라가면서 그 행위를 병리적 징후로 볼지, 영웅화할지는 미지수로 남긴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영화는 존, 일라이, 미셸, 알렉스, 에릭 등 여러 인물의 일상적인 움직임을 담담히 따라가면서 파편화된 시퀀스를 직조한다. 학생들이 복도를 걷고, 대화하고, 사진 찍고, 농구를 하는 평범한 시간들이 반복적으로 교차 편집된다. 관객은 사건의 원인이나 맥락을 해명할 단서를 기대하지만,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카메라는 시공간을 봉합한 끝에 이윽고 ‘총기 난사’라는 임계점에 다다를 뿐이다.

[택시 드라이버 스틸 컷, 사진 = 남아진흥]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 트래비스를 중심에 둔다. 트래비스는 불면증과 고립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깊은 혐오 등 복합적인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는 듯 보인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에서 야간 택시를 운행하는 그는 도시의 이방인으로서 고립감을 느끼면서 불결한 사회를 청소하고 싶다는 분노를 느낀다. 좋아하던 여성 베츠에게 거절당하면서 그의 분노는 더욱 증폭되고, 정치인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그는 결국 매춘 소녀 아이리스를 구해내며 왜곡된 방식으로 ‘영웅’이 된다. 

[엘리펀트 스틸 컷, 사진 = 동숭아트센터]

‘WHY’의 부재, 방 안의 코끼리

‘왜’가 생략된 두 살인극의 목격자로서 우리는 난바다에서 표류하는 무력감을 느낀다. ‘알렉스와 에릭이 극심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아닐까, 혹은 가정환경이 불우한 탓일까?’ ‘트래비스가 전쟁에서 목도한 것은 무엇일까?’ 타당한 인과적 관계망이 부재한 영화에서 살인의 책임을 돌릴 구석을 찾지만 애석하게도 카메라는 답을 주지 않는다. 사고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하나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태산 같은 문제의 복합체가 드러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다.

<엘리펀트>의 핵심인 총기 난사 사건은 후반부 약 15분에 그친다. 그 외 쇼트로 인물들이 보여주는 안온한 일상은 학생들이 학교를 거니는 롱테이크로 채워진다. 인물들은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지만 계속해서 엇나가고 조각나며 이윽고 생과 사의 갈림길을 걷는다. 각자의 시점은 병렬적으로 배열되며 때문에 서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흐름으로 존재하지 않고 ‘일라이’의 카메라처럼 순간을 포착하는 몽타주의 묶음으로 구성된다. 교실, 복도, 운동장—평범하고 지루할 정도로 일상적인 풍경들이 사실은 곧 터질 폭력을 잉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는 타당한 제목이다. 

‘방 안의 코끼리’는 사회적으로 산재한 문제가 있고 해결의 필요성도 느끼지만 모두가 이를 묵과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교실, 복도, 운동장 등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들은 곧 터질 ‘폭력’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품고 있지만 카메라는 문제를 직접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마치 모두가 ‘모른 척하는 것처럼’ 비춘다. 총기 소지, 학교 폭력, 공동체 의식 부재 등 난립한 문제들은 ‘하인리히의 법칙’을 그대로 따라 거대한 스노우 볼이 되어 돌아온다.

[택시 드라이버 스틸 컷, 사진 = 남아진흥]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우리는 ‘이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며 몸을 키우고, 총기를 불법 구매하는 트래비스를 따라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은 잠복기’로써 1시간 20분가량의 시간을 감내한다. 트래비스가 ‘왜’ 불면증을 앓는지, 유흥가의 사람들을 혐오하면서도 ‘왜’ 살인을 동경하는지, ‘왜’ 갑자기 아이리스를 구출하는지 명확한 행동의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트래비스는 끊임없이 자신이 해병대 출신임을 강조하는데, 이 설정은 그가 베트남전의 상흔을 안고 있음을 시사한다. 친절한 설명이 생략된 프레임 밖의 우리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짐작할 뿐이다.

그의 병명에서 짐작건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싸이코'를 작업한 ‘버나드 허먼’이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을 담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에는"신경증은 말하자면 도착증의 부정"이라는 프로이트의 논리가 작동한다. 신경증은 규칙을 내면화한 개인이 그것을 위반하려 할 때 발현되는 불안이며, 도착증은 규칙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상태다. 트래비스는 모범적 삶과 거리가 먼 유흥가의 사람들을 쓸모없다고 여기는 신경증적 증상을 앓으면서도 다른 기사들이 기피하는 골목 곳곳을 다니고 흑인과 매춘부를 가리지 않고 태운다. 모순된 행동들 사이로 삐져나오던 도착증은 극단으로 발현되어 이윽고 그는 살인자가 된다.    

트래비스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다 결국 타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거울  복선’에서 파악할 수 있듯, 살인의 의도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트래비스는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구원자’가 되었다. 포주로부터 딸을 구해주었다며 소녀의 부모에게 감사 편지를 받기까지 한다. 의도가 불순하더라도, 행동이 선하면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의 광기에 사회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가? ‘그를 살인자로 몰아넣은 사회가 그를 의인으로 추앙’하는 역설적인 결말은 철학적 논제를 남겨둔다.   

[택시 드라이버 스틸 컷, 사진 = 남아진흥]

여전한 도덕적 공황상태

두 영화의 결말은 모두 관객을 혼란 속에 남긴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베츠와 다시 마주하는 장면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 만약 그가 이미 죽은 것이라면 이 장면은 환상일 것이고, 살아 있다면 베츠의 굳은 표정은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가 아이리스를 구한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는 단서가 된다. 베츠가 내리고 운전석에 달린 거울을 여러 번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는 그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 거울을 향해 총을 겨누던 그때와 같다. 무엇이 진실이든 영화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로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폭력성 앞에 무력한 우리와 여전한 도덕적 공황상태를 끝으로 ‘변한 것 없고, 변할 수 없는 현실’을 비춘다.

<엘리펀트>의 결말은 폭력의 지속이다. 네이트와 캐리를 두고 ‘이니 미니 마이니 모’를 부르는 알렉스의 모습은 경찰의 진압 같은 사회적 수단도 침범하지 못하고, 어떠한 인간적·종교적 용서도 침입하지 못하는 절대적 폭력의 형태다. 장소도 주목할 점이다. 덩어리 고기가 매달려있는 냉동고에서의 살인 게임은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구에 대한 폭력의 사유’를 동반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영화가 끝났다는 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잔혹성을 상기하지 않고, 여전히 지속되는 폭력과 그 원인에 대한 윤리적 사유를 촉발함으로써 관객에게 폭력의 감각을 전위한다.

[엘리펀트 스틸 컷, 사진 = 동숭아트센터]

<엘리펀트>와 <택시 드라이버>는 전례 없는 영화적 체험을 통해 폭력의 지속성과 윤리적 책임을 되묻는 비판적 사유의 장을 마련한다. 스펙타클한 액션씬을 기대한다면 두 영화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이들은 폭력이 발생하는 현장을 담담하게 ‘응시’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사유는 폭력의 원인을 추적할 것을 종용하고, 나아가 ‘왜 우리는 이러한 폭력이 반복되도록 방치하는가’라는 정치적 물음을 던진다. 봉합되지 않는 폭력의 측면에서 두 영화의 모호한 결말은 전쟁과 테러의 총성이 뒤엉킨 오늘날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객원 에디터 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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