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트릴로지', 이토록 긴 사랑의 기록

2025-09-01     조유정
[비포 선라이즈 스틸 컷, 사진 = 에무필름즈]

긴 시간에 걸쳐 기록된 그들의 사랑 이야기. 그들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는 곧 명소가 되었고, 그 순간에 흘러나온 노래는 명곡이 되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흔히 ‘비포 시리즈’, ‘비포 3부작’, 혹은 ‘비포 트릴로지’라 불리는 이 작품들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피어나고, 성숙하고, 또 현실과 마주하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한 독특한 연애 서사다. 흘러가 버리기 쉬운 사랑의 순간들을 영화라는 틀에 붙잡아둔 기록물이자, 오랜 시간에 걸쳐 촬영된 실험적 연애 영화이기도 하다.

[비포 선셋 스틸 컷, 사진 = 에무필름즈]

끊기지 않은 둘만의 대화

세 편의 중심에는 언제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이 있다. 두 사람은 <비포 선라이즈> 속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가까운 사랑에 빠지고, <비포 선셋>에서는 운명처럼 재회하며 다시금 사랑을 확인하고,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부부로서 현실적인 갈등에 부딪힌다. 하지만 세 영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은 바로 대화다.

세 영화 모두 두 인물의 대화가 중심축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말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에 대한 의견, 예술에 대한 감상, 현실적인 불만과 깨달음까지, 그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영화적 장치로서 대사가 곧 서사의 원동력이 되고, 카메라 역시 그들의 대화를 따라 움직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포 선라이즈> 이후 두 배우가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호크와 델피는 실제 연인이 주고받을 법한 대사들을 함께 쓰고, 각본 그대로 연기했다. 그래서 영화에는 애드리브가 거의 없고, 오히려 대사의 리듬과 호흡을 살리기 위해 반복 연습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대화의 진정성을 살리기 위해 감독은 롱테이크 촬영을 택했다. 한 번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긴 장면들은 배우가 가진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며, 관객 역시 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듯한 체험을 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비포 트릴로지>의 대화는 단순한 서술을 넘어 관객의 귀와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들의 대화 속에서는 사랑이 전부 흘러넘친다.

[비포 미드나잇 스틸 컷, 사진 = 에무필름즈]

링클레이터, 순간을 담고 시간을 잇다

18년에 걸친 세 편의 제작 기간은 영화 역사에서도 드물다. <비포 선라이즈>가 개봉된 뒤 9년 만에 <비포 선셋>, 또다시 9년 뒤 <비포 미드나잇>이 개봉했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실제 시간의 흐름을 작품 속 인물들의 나이와 겹치게 하며, 가상의 사랑 이야기를 현실의 시간 위에 포개 놓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 제시와 셀린의 이야기는 단 하루 만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비엔나에서 해가 뜨기 전까지의 낭만적 하루를 그린 <비포 선라이즈>, 파리에서 해가 지기 전까지의 재회를 담은 <비포 선셋>, 그리스에서 자정이 오기 전까지의 하루 동안 성숙과 갈등을 오가는 <비포 미드나잇>. 세 영화 모두 시간의 제약이 분명하다. 관객은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긴 호흡의 대화를 따라가며, 도시와 풍경을 함께 기억하게 된다. 비엔나의 골목길, 파리의 카페와 강변, 그리스의 고대 유적과 바닷가. 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이자 관객들이 직접 찾아가고 싶은 추억의 장소로 남는다.

링클레이터는 짧은 하루의 순간을 기록하면서도, 그 순간이 누적되어 결국 오랜 사랑의 역사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또 다른 실험작 <보이후드>에서도 드러난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무려 12년에 걸쳐 소년의 성장을 기록한 <보이후드>처럼 <비포 트릴로지> 또한 긴 시간을 영화 속에 통째로 담아내며, 순간과 시간이 서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비포 선라이즈 스틸 컷, 사진 = 에무필름즈]

여전히 머무는 사랑

제시와 셀린의 첫 만남은 낭만의 결정체였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사람이 함께한 청음실 장면은 지금도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Kath Bloom의 ‘Come Here’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대사를 멈추고 서로의 눈빛만을 주고받는다. 어색함과 설렘이 뒤섞인 그 순간, 눈빛은 충분히 사랑을 증명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불확실했다. 기차역에서 헤어지며 “6개월 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겼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기다림 자체가 낭만이었고, 사랑의 애틋한 흔적이었다.

[비포 선셋 스틸 컷, 사진 = 에무필름즈]

9년 뒤 파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 <비포 선셋>은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깃든 만남으로 시작한다. 제시는 이미 가정을 꾸렸고, 셀린에게도 연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단지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듯 보였지만, 대화 속에 내재된 사랑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셀린이 기타를 치며 부른 ‘A Waltz for a Night’는 그들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이다. “하룻밤의 사랑”을 노래하는 셀린의 목소리와 그녀를 바라보는 제시의 눈빛은 더 이상 거짓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제시는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그 후 9년이 지나, <비포 미드나잇>은 현실 속 부부로서의 제시와 셀린을 보여준다. 낭만은 줄고, 대신 아이 양육과 경력, 서로 다른 책임과 욕망이 얽힌 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고, 애틋했던 사랑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제시는 셀린을 찾아간다. 그는 마치 처음 만난 날처럼 상황극을 시작하며 그녀를 다시 웃게 하고, 대화는 또다시 이어진다. 영화는 두 사람의 대화 위에서 서서히 줌아웃하며 막을 내린다.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는 셀린의 얼굴은 상징적이다. 불타올랐던 사랑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은은한 노을처럼 남아 그들을 비춘다.

[비포 미드나잇 스틸 컷, 사진 = 에무필름즈]

18년의 기록

<비포 선라이즈> 의 낭만을 지나, <비포 선셋> 의 운명을 거쳐, <비포 미드나잇> 의 성숙한 사랑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 젊음은 지나갔지만, 지나간 세월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시들지 않았다.

<비포 트릴로지>는 사랑이 시작되고, 흔들리고, 결국 성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젊음은 지나갔지만,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깊다. 순간은 흘러가도 사랑은 머문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여전히 관객의 마음에도 남아 있다. [객원 에디터 조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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