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감정의 심리] ‘바튼 아카데미’, 희망은 어떻게 인간을 다시 서게 하는가?

2025-08-25     석윤희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다시는 웃을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 순간, 다시 걸어갈 힘이 생겼다.”

영화 <바튼 아카데미> (The Holdovers, 2023)는 상실과 고립에 갇힌 세 인물이 뜻밖의 동행을 통해 희망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토대로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주는 내적 자원이다. 영화는 이 감정이 어떻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인간을 다시 서게 하는지 보여준다.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심리학자 찰스 스나이더(Charles Snyder)는 희망을 “목표를 향한 길을 찾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의했다. 희망은 낙관적 태도를 넘어 목표 설정, 경로 사고(pathway thinking), 실행 의지(agency thinking)가 어우러질 때 자라난다.

경로 사고는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길을 떠올리고 계획하는 능력이다. 실행 의지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겠다는 동기와 추진력이다. 쉽게 말해 희망은 “갈 곳을 정하고, 길을 찾고, 걸어갈 힘을 믿는 마음”이 합쳐질 때 생겨난다.

그러나 <바튼 아카데미>의 인물들은 모두 이 세 가지를 잃은 상태에서 등장한다. 폴 선생은 교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길을 잃고 고립된 삶을 산다. 학생들에게 냉소적이고, 스스로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앵거스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듯한 상실감 속에서 분노와 혼란을 반복한다. 메리는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남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무력감에 갇혀 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함께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운명이 이들을 묶는다. 마지못해 함께한 시간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돌보며 예상치 못한 유대와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된다.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신뢰에서 자라는 희망

에릭 에릭슨은 유년기의 심리 과제를 ‘기본적 신뢰 대 불신’으로 보았다. “세상은 안전한가?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 경험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앵거스는 부모로부터 신뢰를 배우지 못했기에 세상을 불신한다. 하지만 폴 선생의 뜻밖의 배려와 메리의 따뜻한 시선은 그가 처음으로 “나를 믿어주는 어른이 있다”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메리 역시 앵거스를 돌보며 잃어버린 ‘돌봄의 의미’를 다시 발견한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폴이 앵거스를 지키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장면이다. 교사로서 잃을 것도 많았지만, 그는 앵거스가 살아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는 스나이더가 말한 ‘경로 사고와 실행 의지’가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순간이다.

희망은 혼자의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를 믿고, 또 누군가에게 믿음을 받는 경험 속에서 자라난다.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희망의 심리학: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

희망은 미래가 보장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한 내일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영화의 마지막, 앵거스는 눈 덮인 길을 걸어 새해의 아침을 맞이한다. 부모와의 관계도, 삶의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절망에 잠겨 있지 않다. “나를 믿어준 어른이 있었다”는 경험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이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희망이다.

우리 삶에서도 희망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오는 것이 아니다. 병이 다 나아야만, 상황이 완전히 좋아져야만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와의 신뢰, 작은 연결의 경험이 “내일도 살아볼 수 있겠다”는 용기를 불러온다.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우리에게 남는 질문

희망은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에서 자란다. <바튼 아카데미>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희망의 손을 내밀 수 있을까?”

“내 안의 얼어붙은 부분을 녹여줄 신뢰의 관계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희망은 거대한 기적이 아니다. 작은 신뢰, 작은 연결, 작은 용기가 모여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운다. 코로나 이후의 고립과 불안 속에서 우리가 더욱 갈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작고 따뜻한 희망이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는다. 눈발 흩날리는 계절에도, 누군가의 따뜻한 숨결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음을.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심미안의 시선

희망은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한 빛이 아니라, 곁에 있는 신뢰 속에서 조용히 자라는 불씨다. 영화 <바튼 아카데미>가 보여준 것은 새로운 삶의 조건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작은 믿음이 만들어낸 변화였다.

새해 아침 눈길을 걸어가는 앵거스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연결의 경험을 발판 삼아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튼 아카데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다음 회차 예고

두려움은 생존을 지키는 본능이자 동시에 우리를 마비시키는 감정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영화 <겟 아웃> (Get Out, 2017)을 통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 억압과 차별 속에서 드러나고, 인간의 심리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살펴본다. [영화 심리 칼럼니스트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

씨네필매거진 공식 인스타그램 @cinephile_mag

https://www.instagram.com/cinephile_mag/

씨네필매거진 객원 에디터 모집: https://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474

씨네필매거진 X 서울필름아카데미 <영화이론과정> 안내: https://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454

씨네필매거진 X 서울필름아카데미 <영화비평입문> 안내: https://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499

씨네필매거진 X 서울필름아카데미 수강 신청: https://forms.gle/1ioW2uqfCQGavsZs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