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트 오브 킬링', 편집권을 둘러싼 성찰

2025-08-20     송용환

한 가지 염려가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이 ‘안와르’라는 인물 내면의 먼지를 털어내 큰 충격을 선사하는 작품으로만 소비될까 하는 염려다. 혹자는 그의 구역질을 보며 다시 구역질하고, 분노하고, 탄식하며 영화를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잘못된 독해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의 성취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어딘가 모자란 독해다. <액트 오브 킬링>은 단순히 ‘그대들이 저질렀던 만행이 바로 이겁니다’라는 고발이나 감정적 분노를 유발하는 평면적 영화가 아니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편집이라는 문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편집’이라는 문제를 짚어야 한다. 영화는 촬영본을 숏으로 쪼개고, 선택하고, 나열하고, 붙이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선택하지 않음 역시 하나의 선택이며, 그 부재 자체가 의미를 형성한다. 결국 편집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권리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인도네시아 반공주의자들의 40년 전 학살을 재연하는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담는다. 그렇다면 영화 속 영화의 편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 질문이 곧 작품의 성취를 해명하는 핵심이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그들의 편집과 은폐

안와르를 비롯한 학살 가해자들, 즉 ‘그들’은 역사를 오랫동안 자기식으로 편집해왔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과장하고, 학살을 애국으로 합리화하며, 원하지 않는 진실은 배제했다. 편집은 여기서 정당화의 도구로 기능한다. 보여주고 싶은 장면만 택해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불편한 사실은 삭제하는 식이다.

이때 <액트 오브 킬링>의 ‘극중극’은 인간이 독점해온 편집권을 빼앗아 보는 실험이다. 필요한 장면마저 배제하는 임의의 편집이 어떤 폐단을 낳는지 드러내려는 시도다. 오펜하이머는 가해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던 역사를 다시 꺼내어 편집하고, 선택되지 않았던 장면들을 영화 속으로 호출한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편집은 어디에나 있다

편집은 영화 제작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 한 남성이 “죄를 물으려면 카인과 아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이는 단순한 궤변이 아니라, 하나의 편집이다. 머릿속의 정보들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배열한 결과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정보를 편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편집이 유용하기보다는 위험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나치 인종주의의 근간이었던 우생학은 진화론 일부만을 자의적으로 편집한 결과물이었다. 굳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편집권의 남용을 본다. 오늘날 범람하는 정보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것만을 취사선택하며 ‘편집된 세계’를 살아간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무사유와 악의 평범성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의 악행이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무사유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무사유는 곧 무책임을 낳는다. 그리고 타인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편집이 바로 그런 무사유의 발현이다. 선택되지 못한 입장은 버려지고, 스스로에게 유리한 것만을 택한 편집자는 사유 능력을 잃는다. 결국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약화되며, 무책임만을 반복하게 된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오펜하이머의 실험

<액트 오브 킬링>은 극중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가해자들에게 뒤늦은 사유를 요구한다.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 속 배우 엘리자베스가 상대 인물의 삶을 체험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첫째, 오펜하이머는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촬영본의 내용을 재연하는 배우로 직접 참여시키면서, 그들의 몸을 통해 과거가 소환된다. 영화 제목의 “Act”는 이 지점에서 재해석된다.

둘째, 편집권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는다. 극중극의 편집은 온전히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몫이다.

셋째, 그들이 왜곡해온 이야기를 조슈아의 편집으로 다시 보여준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배제된 역사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무사유의 늪에 빠져 있던 가해자들을 붙잡아내고, 그들의 내면을 마주 보게 한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자기반영적 질문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자기반영적 질문을 던진다. 편집권이 인간에게 과분하다면, 오펜하이머에게 부여된 편집권은 정당한가? 그 역시 인간인데, 그에게는 자격이 있는가?

영화의 촬영은 일종의 ‘거울 치료’ 과정이다. “이번엔 우리가 편집권을 행사해 보겠다"라는 선언이자, 기록 자체를 통해 자의적 편집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편집의 임의성을 억제한다. 오펜하이머는 철저히 가해자들의 심리 변화를 기록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넋을 잃은 얼굴, 차갑게 굳어가는 표정 속에서 편집권의 무게를 드러냈다.

편집권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권리에 따르는 책임의 끈만 놓치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 권한을 통해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다. 가해자들이 마지막에 흘린 억눌린 눈물과 경직된 표정은, 감정을 합리화하던 그들의 서사가 균열 나는 순간이었다.

[액트 오브 킬링 스틸 컷, 사진 = 엣나인필름]

메타적 성취와 사회적 성찰

이 영화는 두 층위에서 성취를 거둔다. 외부적으로는 편집에 대한 성찰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메타 영화적이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정보를 어떻게 편집하는가를 되묻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 논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별종’이라 말할 수 없다. 그들의 맥락은 다르지만, 방식은 낯설지 않다. 학살을 자행한 그들, 돈을 좇아 선거 유세에 참여한 시민들,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개인들, 사유를 멈춘 인간들. 선과 악은 구분되지 않고 얽혀 있으며, 지구는 결국 하나의 회색 지대다.

이것은 과장도 경고도 아니다. 다만 격한 감정에서 벗어나 본질을 성찰하길 바라는 요청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편집하며 살고 있는가?” [객원 에디터 송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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