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시대와 정체성을 건축하는 미학적 태도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시온주의

2025-07-31     이성은

<브루탈리스트>의 매력은 드러냄에서 나타난다. 제목에서 보이는 ‘브루탈리즘(Brutalism)’은 건축의 한 양식으로서, 건축에 사용된 소재, 콘크리트와 철근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영화 스스로가 모든 부분을 드러내는 존재인 브루탈리스트라 칭하고 있다.

이 <브루탈리스트>와 더불어, 최근 개봉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4), <브루탈리스트>, <리얼페인> (2024)을 유대인 세대의 정체성을 다루는 동시대 작품으로 묶어, 유대인 3부작으로 부르고 싶다. 이 작품들은 <인생은 아름다워> (1997), <피아니스트> (2003)에서 보인 묘사와 상반되어 있다. 관계보다는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 매우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나고 있다.

[브루탈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시대가 변화하였다.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은 3세대에 접어들었다. 더불어 유대인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이 겪은 수 천 년 간의 핍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고,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유대인에 대한 정체성도 변화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들이었다. 성경 중 출애굽기―역사적으로 사실관계를 알 수 없지만―의 내용인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을 살펴보아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도, 십자군 전쟁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시피, 그들은 항상 핍박받고,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겉을 맴도는 존재들이었다.

<브루탈리스트>는 아내인 에르제벳의 목소리와 함께, 라즐로가 배에 부유하여, 뉴욕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함으로써 시작한다. 그가 곧바로 찾은 곳은 사창가이다. 아내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사창가 신에서, 관객들은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 즉 유대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들은 유대인을 숭고하게까지 보이게 묘사하여왔다. 하지만 <브루탈리스트>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까지 함께 보여준다.

[브루탈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사창가 신을 살펴보면 그는 씨를 뿌리지 않는다. 그리고 2막에서 에르제벳과의 조우에서도, 후에 다시 등장하는 그녀와의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은 미국에서 외국인, 이방인이기에 이곳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조금 더 직접적인 드러낼 때는 친척인 마틸라의 집에서 쫓겨날 때, 석탄을 캐다 해리의 집으로 갈 때, 라즐로가 편지의 끝말을 “나 딴 데로 갈 거야.”라 할 때이다.

라즐로가 처음 정착한 곳은 친척 집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집에서조차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에서 생활한다. 가구점의 중심이 아닌 외각에 있는 창고에서 거주한다. 그런 그가 처음 만든 것은 의자이다. 수납장, 책상, 침대 등의 가구들은 이동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은 놓인 자리에 들어서면 웬만하면 이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자는 언제나 이동한다. 책상과 함께 놓인 의자에 앉을 때, 책상을 이동시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유대인을 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의자를 처음 제작하고 라즐로가 한 말은 “그냥 그 자리에 둬.”이다. 이 대사는 후에 해리의 대사와 맞물린다. 해리가 처음 서재와 조우했을 때, 그가 소리친다.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데! 당신이 어떻게 알아!”라고.

유대인은 항상 안정적인 위치에 놓이고 싶어 한다. 서재의 중심에 채광을 받은 채 놓여있는 의자, 혹은 후에 건설되는 ‘현재 속의 과거’의 중심부에 있는 대리석처럼 말이다. 그들은 더 이상 떠돌지 않고 안정적인 자리에 뿌리내리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들을 끊임없이 이동하게 만들거나, 고정된 자리에 머물면 치욕을 안기는 식이다. 이동성과 고립, 그 사이에서 그들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브루탈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라즐로를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은 ‘현재 속의 과거’이다. 이 ‘현재 속의 과거’가 완공되는 데까지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레슬리와의 의견 마찰과 해리의 ―인종차별을 동반한―방해, 심지어는 자사의 사고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마지막 라즐로의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적지가 중요할 뿐이다.”라는 대사와 같이 건축물은 라즐로의 작품으로서 완공된다.

라즐로와 고든이 처음 마주했을 때, 스스로를 청색이 띠는 자켓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는 카라라 대리석과 일치하는데, 그 청회색 대리석이 ‘현재 속의 과거’의 중심부에 안착한다. 모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중심부에 햇빛을 받아, 십자가를 띠게 된 카라라 대리석. 라즐로도 마찬가지로 자리를 잡는다.

그 과정 중 가장 치욕적인 순간은 바로 해리에 의해 겁탈당할 때일 것이다. 라즐로가 취한 틈에 해리가 와서 겁탈한다. 라즐로의 능력을 무시하고,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언행을 하는데, 이는 과거에 유대인이 받았던 시선,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미국 내에서의 차별을 시사하고 있다.

[브루탈리스트 스틸 컷, 사진 = 유니버설 픽쳐스]

‘현재 속의 과거’를 수색할 때 또한 라즐로를 연상시킨다. 수색원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방향은 배수로에서부터 예배당까지이다. 이는 해리에게 항문을 통해 겁탈 당하는 라즐로와 유사하다. 건물 내부에 강렬하게 십자가가 놓여있는 것은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적지가 중요할 뿐이다.”라는 대사와 같이 시련 속에서 그의 신념이 무너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라즐로가 말한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 자신이 프로젝트한 건물들이 남아 있다고.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자리에 우뚝 남아있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후손들이라, 말하고 있다. 라즐로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지만, 이스라엘로 이주한 조카 조피아는 딸을 낳는다. 그녀는 안정적인 장소에서 자손을 남긴 것이다. 지금까지 받아온 수많은 폭격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자신의 건축물처럼, 역사 속에서 받아온 핍박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유대인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벳과 소피아가 아닌 에르제벳과 조피아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말이다.

<리얼 페인>에서 말하고 있다시피, 현재 유대인은 3세대이다. 학살을 피해 망명한 1세대, 그들의 자손인 2세대, 현재 3세대까지. 세대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과거처럼 더 이상 피해자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드러냄―브루탈리즘―으로서 유대인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바라봐주길 바라고 있다. [객원 에디터 이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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