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진동하는 자유와 연대
근미래의 일본을 통해 인류의 사회상을 비추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통해 아름다운 작별의 시간을 연출했던 네오 소라 감독이, 이번엔 극영화 <해피엔드>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음악을 통해 분열된 사회를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를 펼친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해피엔드>는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불합리, 차별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어, 곧 마주하게될 미래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그가 이런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달려 들겠다는 의지를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드러난다. 암전 직후, 강렬한 음악과 함께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내 틸트다운으로서 추락의 효과를 준다. 추락하는 시각적 연출은 오늘날 사회의 붕괴를 은유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네오 소라 감독의 의도는 영화 곳곳에서 포착된다.
영화의 첫 사건은 클럽에서 발생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진, 유타 일행은 클럽에 몰래 잠입한다. 이 공간은 매우 강렬한 음악이 가득 매우고 있다. 경찰이 들이 닥쳐도, 유타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고개를 흔들고 있다. 그의 친구 코우의 상황은 다르다. 경찰이란 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이유는 다음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경찰의 일본인인 유타에 대한 처벌은 훈방정도로 끝내지만, 코우에겐 아니다. 재일교포인 코우의 명칭을 바로 박군이라 고쳐 부르며, 특별영주자증명서를 요구한다. 이러한 차별대우에 인이 박혔던 코우가 보인, 클럽에서 친구를 버리고 도망가려 한 태도가 이해가 간다. 이와 같은 차별대우는 연속적이고, 심화되어 간다.
그들의 다음 행선지는 학교다. 학교 동아리방에서 경찰에 의해 끊겼던 음악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해가 뜰 때까지 그들의 행위가 이어진다. 이어지는 행선지는 집이다. 정상적인 시간적―공간적 흐름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리고 집 ― 학교 ― 놀이터(클럽)이다. 이 시간적―공간적 흐름을 <해피엔드>는 역행적으로 서술한다. 이를 통해 사회의 도덕적 ―정치적 의식이 역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의 주된 모멘텀은 바로 자유이다. 시민들이 새로운 총리에 의해 자유가 억압된, 감시와 검열에 대해 몸부림치고 있다. 근 미래의 일본인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는 음악이다. 시위대들 또한 시위를 마치고 노래로써 하나로 응집한다. 유타 일행도 마찬가지다. 음악이라는 자유를 빼앗기자, 벌점이라는 처벌 ―그들에게 최고의 형벌― 을 무릅쓰고 음악장비를 훔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서지 않던 유타가 유일하게 행동한 것이 바로 음악 ―자유―을 빼앗겼을 때이다. 관객은 그 절박함을 직접 체감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네오 소라 감독은 음악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큰 지진일 일어나는 순간, 소리가 블링크되어 있다. 파괴되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괴기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와 정반대되는 상황을 보여주어 두 상황을 대비시킨다. 그것은 바로 음악이 들릴 때이다. 그들이 듣는 음악에는 우퍼가 필요하다. 클럽 안 우퍼의 소리가 가슴을 때리는 느낌을 극장에서 느끼게 한다. 초반 강렬한 음악과 EDM음악을 우린 극장 안에서 듣게 된다. 극장 안의 스피커들을 통해 우린 유타 일행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심장의 떨림, 우리가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네오 소라 감독은 유타 일행의 동아리방을 통해서 시각적으로도 자유를 묘사한다. 처음 동아리방에서 음악을 할 때는 공간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반면 장비들을 모두 빼앗기고 나서는, 동아리방 바깥, 문 밖에서 촬영하여 문 사이로 보이는 다섯 명을 보여준다. 매우 협소하게 촬영하여, 상실한 자유를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음악이 없는 순간을 파괴의 순간으로, 음악을 통해 심장이 고동침을 느끼게 하여, 자유를 표현한 것이다. 음악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극장 안 스피커를 통해 연출했다.
<해피엔드>의 사회는 단일한 민족성보다,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유타일행에서도, 일본, 중국, 미국, 한국계 일본인으로, 다양하게 어울리고 있다. 이를 차별하는 총리에게 도시락 테러가 일어난다. 도시락이란, 밥과, 반찬과 같이 다양한 음식이 한대 어울린 장치이다. 다양성을 부정함을 도시락을 엎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음식으로 다문화를 드러낸 대표적인 장치가 바로 김밥이다.
김밥이란 밥과 단무지, 햄, 맛살, 당근, 오이를 김이라는 테두리로 감싼 형태이다. 이처럼 테투리 안에 다양한 재료가 어울려야 하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다, 이에 가장 반하는 인물은 아마 교장일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 체계로서 학생들을 억압하는 인물을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유타이고, 가장 심하게 공격한 것은 후미이다.
일본인인 두 인물은 스스로 소리를 내는 인물들이다. 유타는 EDM으로서, 후미는 시위로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코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리를 떠는 일뿐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퍼의 떨림, 극장안의 스피커에 의해 심장의 울림은 자유를 의미한다. 다리를 떠는 일 또한 미약하지만 결국 진동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행동에 유타도, 후미도 응답한다.
교장실에서 농성을 벌일 때, 그 적막을 깬 것이 바로 노크소리다. 그 작은 진동으로 분위기가 환기 되었고, 이후에 등장한 김밥으로 상황이 종료된다. <해피엔드>는 진동을 통해 자유를, 김밥을 통해 화합을 외치고 있다.
결국 후미 일행은 교장과의 교섭에서 이긴다. 교장은 질문한다. '지금 체계를 바꿔도, 너희는 이미 졸업할 시점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 그렇다. 이들은 3학년이기에 졸업하고 나서 실행되기에, 이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 일행은 교섭한다. 이들처럼 지금 당장의 이윤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묵인하고 회피하면 더 나은 미래가 없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유타는 처음 교장의 차를 박살낸 책임을 진다. 그리고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톰은 미국으로 떠남과 동시에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인사는 “나중에 봐!”이다. 이별이 아닌, 만남을 약속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일치되는 장면으로서, 마찬가지로 놀이터에서 학교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꼴이다.
마치 이후가 없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들은 만날 것이다. 총리와 교장과 같은 기득권이 영화 내에서 비판 받는 이유가 바로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아서이다. 유타 일행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한 말에 책임을 질 것이다. 제목부터가 ‘해피엔드’이지 않은가. [객원 에디터 이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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