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성장의 심리학] 성인 초기, 친밀감과 고립의 경계에서 - 영화 ‘그녀'
성숙한 친밀감을 향한 불안한 여정
“나는 누구와 연결될 수 있는가?” - 영화 <그녀>가 던지는 물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시기다. 청소년기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한다면, 성인 초기의 심리 발달은 ‘나는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간다. 외로움이 일상이 된 시대, 사람들은 점점 더 감정을 대신 이해 해주는 존재를 찾고, 기술은 그 틈을 파고든다.
‘영화로 읽는 성장의 심리학’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영화 <그녀(Her, 2013)>를 통해, 성인 초기의 발달 단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친밀감과 고립감의 심리, 그리고 ‘진짜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을 따라가 본다.
■ 관계를 묻는 시간 - 친밀감을 찾아가는 성인기
‘나는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삶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시기다. 성인 초기(20~40세)는 사랑과 신뢰, 상호성의 관계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기이며, 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아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 시기를 ‘친밀감 대 고립감’의 단계로 보았다.
이 시기의 내면에는 친밀감에 대한 두 가지 욕구가 충돌한다. 누구와 가까워지고 싶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숨기기도 한다. 영화 <그녀>는 바로 이 미묘한 심리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한 남성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시어도어(테오도르)는 진심을 나누는 관계를 원하지만, 동시에 진짜 관계 앞에서는 주저하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밀감과 고립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는 우리가 성인기의 어딘가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을 대신 끌어안고 있다.
■ 감정의 대필자 – 연결의 환상과 정서적 소진
주인공 시어도어는 타인의 감정을 대신 써주는 ‘편지 대필 작가’로 일한다. 사랑의 언어를 대신 써주는 이 일은 그로 하여금 감정 전달에는 능숙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진심으로 느끼고 나누는 데에는 서툴게 만들었다. 이처럼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는 감정노동의 과잉 속에서 정서적으로 점점 더 고갈되어 간다.
그는 이혼 후 상처받을까 두려워 사람 대신 AI 운영체제 ‘사만다’에게 마음을 연다. 사만다는 늘 그를 살피며 반응하고 이해하면서 정서적으로도 점점 진화한다. 시어도어는 잠시 고립을 잊은 듯 보이나 결국 ‘일방적 이해의 환상’ 위에 세워진 관계는 그를 더 깊은 외로움에 갇히게 만든다.
이렇게 관계를 회피하면서도 연결을 갈망하는 이중적인 내면은, 기술에 감정을 맡기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 상처와 재연 – 어긋난 관계와 애착의 뿌리
시어도어는 전처 캐서린에 대해 여전히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다. 그에게 캐서린은 한때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며, 여전히 이상적인 파트너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관계가 실패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기 회피의 흔적도 함께 지니고 있다. 캐서린은 시어도어에게 “넌 항상 진짜 감정을 피하고 행복한 척만 해”라고 말하며 그의 내면을 직면시킨다. 이 장면은 시어도어가 자신의 미성숙함과 정서 회피를 자각하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바닷가에서 그는 사만다에게 캐서린과의 관계가 어려웠던 이유를 고백한다.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서로 변화하며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마음속에서 캐서린과 싸우며, 그녀의 비난에 자신을 방어하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이 장면은 관계 안에서의 자기 회피, 상처,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내면의 재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진짜 친밀감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감정적 고백의 무게를 암시한다.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시어도어가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의 초기 설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이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땠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다. 이는 정보 수집 이면에 심리학적으로 초기 애착이 성인기의 이성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반영하는 설정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처음 맺는 관계, 특히 이성 부모와의 관계는 이후 연애나 친밀감 형성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시어도어의 감정 회피는 과거의 애착 경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 색으로 말하는 마음 – 관계 속 고립과 친밀감의 색감들
영화 <그녀>에서 시어도어가 입는 셔츠의 색은 그가 관계 안에서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는, 친밀감과 고립감 사이의 흔들리는 마음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붉은 계열은 강한 정서적 몰입과 관계 속 감정의 고조를, 체크무늬는 사만다와의 데이트, 캐서린과의 이혼 장면 등 관계의 전환점에서 등장하며, 불안정한 정서나 관계의 복잡함을 시각적으로 반영하는 요소로 읽을 수 있다. 노란색은 관계로 나아가려는 희미한 희망과 감정 회복의 신호이며, 마지막 장면에 입고 나오는 흰 셔츠는 상실 이후 혼자만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고독을 견디며 다시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된 내면 상태를 상징한다.
색채는 이렇게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따라가며, 성숙한 친밀감에 이르기까지 겪는 내면의 흐름을 섬세하게 시각화한다. 시어도어가 친밀감과 고립감 사이를 오가며 점점 더 정제된 연결을 배워가는 여정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 ‘Her’에서 ‘She’로 – 이별 후에야 배우는 사랑, 고독 너머의 성숙
영화의 제목이 ‘She’가 아닌 소유격 ‘Her’인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처음의 사만다는 시어도어의 감정과 욕망이 투사된 존재, 곧 관계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만다는 독립된 인격과 사고를 가진 존재, ‘She’로 변화한다. 관계란 누군가를 나의 일부처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연결되는 것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시어도어가 진정한 친밀감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관계의 시선이다.
사만다가 떠난 뒤, 시어도어는 전처 캐서린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그 편지에는 과거의 감정과 미성숙했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미안함과 애정이 담겨 있다. 이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고,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며 남아 있던 마음의 찌꺼기를 흘려보내는 심리적 정화의 행위다. 타인에게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조용한 감정의 마침표에 가깝다.
감정을 정리하며 에이미와 나란히 옥상에 자리한 그는 비로소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조용하고 단단한 연결감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외로움과 고독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끝에 도달한, 성숙한 친밀감의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결혼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만이 타인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시어도어는 사만다와의 감정적 몰입, 캐서린과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자기 회피의 인식, 그리고 에이미와의 조용한 교감을 통해 자신이 진짜로 연결되고 싶은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 조금씩 답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사랑에 대한 해답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성인기 문턱에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나는 누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관계를 향한 본질적인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더 깊고 성숙한 연결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 다음 회차 예고
다음 회차에서는 영화 <줄리에타(Julieta)>를 통해, 중년기에 찾아오는 상실과 죄책감, 그리고 삶의 의미를 회복해 가는 여정을 따라가 보려 한다. 깊은 침체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 감정의 회고를 통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성인 중기의 자기 정체성과 생산성 회복의 과제를 함께 들여다볼 예정이다. [객원 에디터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