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가치의 전복과 역설로 빚어낸 불편하지만 유쾌한 이야기

뒤집어도 삼각형이 되는 희비극

2025-04-24     양현대

‘삼각형’하면 저마다 떠오르는 이미지, 의미들이 있을 것이다. 삼각자, 삼각관계 등. 몇 년 전의 나라면 ‘삼각형’하면 떠오르는 것이 단연 삼각김밥이었겠지만, 지금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슬픔의 삼각형>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며, 무슨 의미로 쓰인 것일까. 그리고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의 초반, 주인공 ‘칼’의 모델 오디션장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바로 나온다. 심사를 보는 심사위원들이 ‘칼’에게 “눈썹 사이에 있는 ‘슬픔의 삼각형’을 좀 펴줄 수 있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말이다. 여기서 ‘슬픔의 삼각형’은 직접적으로는 얼굴을 찡그릴 때 미간 사이에 발생하는 그 주름을 말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는 점점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것은 계급의 피라미드를 말하는 삼각형, 혹은 인간 욕구를 표현한 ‘매슬로의 5단 욕구’ 삼각형 등으로 그 의미가 넓어지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얼굴의 그 주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가치의 전복, 계급의 전복을 시도하고, 그 안에서 역설의 의미를 찾으며 돈의 허황과 허세, 자본주의와 인간의 취약점을 계속 찾으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삼각형의 구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Part.1부터 part.3로 나뉘어있는 영화 이야기 속의 전복과 역설, 그리고 삼각형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Part.1 Carl & Yaya – 화면 밖의 일반적인 세상의 전복.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전복

현실의 세상에서는 아직까지는 남자의 평균적인 수익이 여자의 평균적인 수익보다 높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남녀평등, 페미니즘을 외치며 격차 해소, 평등한 관계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초장부터 우리의 현실을 전복한다. 경력이 단절되어 다시 시작하려는 ‘칼’은 여자 모델에 비해 수익이 1/3밖에 되지 않는 남자 모델 지망생이고, 주위의 수많은 게이들의 성적 추문이나 추파를 견뎌야 하며, 노골적인 외모 평가와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연인인 ‘야야’는 여성 모델 중에서도 탑 모델, 자신보다 수익이 월등히 좋은 상황인데도 은연중에 ‘야야’는 ‘칼’에게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게 한다. 그리고 둘은 갈등과 싸움 끝에 솔직해지는데, ‘야야’는 자신의 모델 경력이 끝나면 그저 트로피와이프가 될 뿐이라며 남자를 시험하게 되었다 말하고, ‘칼’은 ‘야야’에게 자신을 진정하게 사랑하게 만들 것이라고 선언한다.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역설  

관계의 전복은 역설을 발생시킨다. 기존의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 평등해지고 싶다는 말을 여자인 ‘야야’가 아닌 남자인 ‘칼’이 하게 된다. 현실과 다른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성 역할이 그렇기 때문에 수입과 관계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칼’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서 나오는 이 한마디 대사는 심지어 정당하게도 보인다.  

“bullshit feminist”

사실 이렇게 역설을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의도는 영화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초반 ‘칼’의 오디션 대기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남자는 그들에게 '우정' '평등' '인종차별반대' 등을 내세우지만, 대놓고 값비싼 브랜드와 값싼 브랜드의 차이점을 언급하며 그에 따라 다른 모델 연기를 오디션 대기자들에게 요청한다.

또한 탑 모델인 ‘야야’의 런웨이에서도 '낙관론을 가장한 냉소주의' '기후변화를 막자' '평등'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패션쇼 진행 스태프는 돈이 많은 VIP 손님의 좌석을 위해 다른 앞자리 손님들을 쫓아낸다. 그 여파로 ‘칼’은 구석에서 연인의 패션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평등을 외치며 차별을 서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인 것이다.

Part.2 Yacht – 화면 안에서 계급의 전복.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전복

‘칼’은 ‘야야’의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고급 럭셔리 요트에 탑승하게 되고, 그곳에서 많은 소위 ‘부자’들을 만난다. 럭셔리 요트의 계층은 단순하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부자들은 이 요트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모든 선원들은 부자들에게 무조건 YES라고 교육받는다. 부자들은 말 한마디로도 선원이나 청소부를 해고할 수 있고, 선원들은 YES맨이 되어서 부자들의 돈을 팁으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때 돈, 돈, 돈을 외치며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는 선원들의 모습은 다소 기괴해 보이며, 그보다 더 밑의 층에 살고 있는 청소부들은 그 소리에 의아해한다. 위상적으로도, 실제 배 안에서의 생활의 모습을 봐도 저 삼각 피라미드의 형태로 계층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는 선장인 ‘토마스’에 의해 전복된다. 선장과의 만찬을 다른 날도 아닌 저기압으로 진입하는 날로 설정하고, 배는 비바람과 파도에 휘몰아치며 거의 전복되다시피 한다. 배가 점점 심하게 흔들리자 배의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부자들은 토하며 음식을 게워내고, 화장실에서 벌벌 떠는 등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비규환을 겪는다. 결국 방에 들어가 구명조끼를 붙잡고 벌벌 떨며 이 난리가 그치기만을 기다린다. 배는 토사물과 배설물로 엉망이 된다. 그러나 배의 환경에 익숙한 선원들은 평소랑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인다. 환경을 전복함으로써 계급의 전복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부들은 부자들의 토사물과 배설물, 깨진 잔 조각 등의 뒤처리를 하고 있다. 전복을 했음에도 여전히 청소부는 피라미드의 밑바닥인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역설  

이 전복을 유도한 선장 ‘토마스’는 노골적으로 부자들에 대한 혐오를 노출한다. 난리가 된 선장 만찬 자리 전에는 한 번도 제대로 갖춰 입고 손님들을 맞이한 적이 없고, 이런 난리가 날 줄 알았음에도 일부러 폭풍우가 있을 때 선장 만찬을 연다. 부자들에게는 최고급 파인 다이닝 요리를 꺼내놓지만 정작 자신은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는다. 그리고 부자들의 탈세, 허세, 세상 물정 모르는 태도 등을 방송으로 꼬집으며 그 감정을 표현한다. 마치 ‘당신들의 더럽고 추잡하고 속물스러운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라’는 선장의 의지가 담긴 모습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선장과 마지막까지 남아 대립하는 부자 인물, ‘드미트리’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art.2의 초반 ‘칼’과 ‘야야’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부터 그는 돈과 관련되면서 아주 현실적이고 동시에 아주 역설적인 대사를 말한다.

“I Sell Shit – 똥팔이요”

가장 쓸모없는 배설물인 똥을 판다는 드미트리는 적절한 때와 장소를 잘 만나 부자가 된 ‘King of shit’이었다. 그는 요트에, 말 그대로 그의 아내와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 3명이서 삼각관계인 사람이 아무 염치나 부끄러움 없이 자연스럽게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삼각형과 역설을 모두 보여준 드미트리는 토마스와의 1대1 대화에서도 역설을 보여준다. 토마스는 미국인이지만 누구보다 부자들의 부당한 부를 싫어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드미트리는 러시아 사람이지만 자본주의의 수혜를 받은 자본주의자였다. 두 사람은 캐릭터의 아이러니를 서로가 생각하는 격언을 통해 나누며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신다. 마침내 폭풍우가 잦아들고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듯 했던 요트는, 요트의 고객인 한 노년의 부부가 평화를 위해 생산했다는 수류탄이 해적에 의해 배에 떨어지면서 완전히 뒤집히고 만다.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Part.3 Island – Part.1과 Part.2의 전복.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전복  

배는 말 그대로 폭발하고, 생존자들은 무인도 섬에서 모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완전한 계급의 전복이 이뤄진다. 부자들은 실상 돈만 많았지 섬에서 생존에 필요한 사냥, 불 피우기, 요리 등은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과거 요트에서 청소부였던 ‘아비게일’만이 사냥도 할 줄 알고 불도 피울 줄 아는, 생존에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에 ‘아비게일’은 자신을 섬에서의 캡틴으로 스스로 칭하고, 계급을 뒤집는다. 그리고 생존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성 연대를 통해 이 계급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언제까지 살아남을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복종하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전복을 통해 ‘아비게일’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된다. 먹을 것을 이용하여 ‘칼’과의 잠자리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곳의 모두가 ‘칼’과 ‘야야’가 연인인 것을 알지만 아무도 지적할 수 없었고, ‘칼’ 또한 이를 마냥 거부할 수 없었기에 이 불편한 삼각관계는 꽤 오랫동안 지속이 된다. Part.1에서 ‘칼’은 ‘야야’에게 이용당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스스로 ‘아비게일’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Part.1에서 강자로 표현되던 ‘야야’는 그 위상이 뒤집혀 오히려 약자가 되어 소리만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렇듯 그럭저럭 안정적인 삼각 피라미드 계층 체계 안에서 지내는 듯했으나, ‘야야’가 섬 주변을 돌아다니던 중 럭셔리 리조트를 발견하고 상황은 급변한다. 사실 알고 보니 이곳은 무인도가 아니라 럭셔리 리조트 섬이었던 것이다. ‘아비게일’이 꼭대기에 위치한 현 체제 또한 다시 전복되어,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모두 맞닥뜨린다.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역설  

배에서는 최하층에서 살며 청소부로 일했던 ‘아비게일’이 섬에서 누구보다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역설적인 모습은, 우리 누구라도 권력이나 상층의 위상을 잡게 되면 그렇게 변하지 않겠냐는 무서운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자신 있게 “아니오”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필수불가결이 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대가를 당당하게 원하는 ‘아비게일’은 그 섬의 모습이 영원할 것처럼 군림한다. 한편 열정적인 러시아 자본주의자였던 ‘드미트리’는 섬에서 자신의 생산력이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자 ‘각자가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생산에 기여하고, 결과물은 평등하게 나누자’는 누구보다 공산주의자 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자본주의자로서 그렇게 자신을 피력하던 Part.2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는 역설적인 모습이다.

‘칼’이 이용당하는 것이 아무 저항을 못하던 ‘야야’는 결국 주위를 둘러보기로 결심, ‘아비게일’과 함께 떠난 길에서 럭셔리 리조트 엘리베이터를 발견한다. 지긋지긋한 이 계급 밑바닥의 섬생활이 끝날 것을 예감한 ‘야야’는 바로 ‘아비게일’을 최초 요트에서 계급의 최하층으로 대하고, 자신의 모델 일 어시스턴트를 하면 괜찮을 거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야야’의 뒤에서 ‘아비게일’은 큰 돌로 ‘야야’의 머리를 찍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현 상황처럼 섬에서의 더럽고 후지지만 계급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생활이 문명에서의 바닥 생활보다 더 낫다고 ‘아비게일’은 생각했던 것일까.

[슬픔의 삼각형 스틸 컷,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결론  

마치 사회 실험을 설계한 것처럼, 감독은 영화 <슬픔의 삼각형> 안에서 계급의 전복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그 모습으로 하여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현재의 체제와 상황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굉장한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 보여주면서 불쾌하지만 유쾌한, 역설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얼굴 미간의 주름을 뜻하는 말인 <슬픔의 삼각형>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주름과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필자가 느낀 감독의 생각은 이렇다.

"세상을 아무리 뒤집어도 결국 모양은 삼각형이더라. 뒤집고 또 뒤집어도 여전히 삼각형이라니, 그래서 더 서글프다." [영화감독 양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