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성장의 심리학] 관계 속에서 자라는 ‘나’ - 영화 ‘우리들'
‘나’를 알아가는 성장의 순간들
“그냥...” – 영화 <우리들> 중 ‘선’의 대사
성장은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 마음을 말하지 못해 입술을 깨무는 시간이다. 특히 아동기의 성장은, 그 마음을 말할 방법을 배우는 관계 속의 첫 시련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먼저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워버리는 마음. 우정을 쌓기도 전에 상처를 먼저 배워야 하는 아이들.
■ 소속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 또래 속 나를 세우는 시기
아동기는 아이가 처음으로 또래 속에서 ‘나는 잘하고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기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커지지만, 자칫하면 작은 비교와 소외 경험이 “나는 부족한 아이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이 형성되는 첫 무대가 바로 이 시기인 것이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 시기를 ‘근면성 대 열등감(Industry vs Inferiority)’의 시기라 정의하며, 이 과정에서 성취의 경험은 자신감을, 반복되는 실패나 관계의 상처는 깊은 열등감을 남긴다고 설명했다.
영화 <우리들>은 그러한 아동기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주인공 선은 또래 관계 안에서 외로움과 소외, 오해와 갈등을 겪으며, 서툴지만 간절하게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애쓴다.
이 영화는 소속되고 싶어 하지만 밀려나는 마음,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상처가 앞서는 관계 속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으면서도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조용하고 진심 어린 시선으로 보여준다.
■ 말하지 못한 마음 - ‘그냥’이라는 말에 숨은 감정들
“그냥.” 선의 입에서 가장 자주 튀어나오는 두 음절이다. ‘속상한 이유가 뭐야?’라는 물음에도, ‘무슨 일 있었어?’라는 걱정에도 아이는 이 말 한마디로 마음을 봉인한다. 설명되지 못한 슬픔·서운함·불안이 ‘그냥’이라는 작은 방어막 뒤에 층층이 쌓인다. 아이는 말을 아끼지만, 마음은 아프다.
아동기는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시기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아직 자기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옮기기 어렵고, 그 때문에 ‘그냥’이라는 말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속상하다는 걸 알지만, 왜 그런지 말로 풀 자신이 없을 때, 아이는 말 대신 침묵을 택한다.
영화 속 ‘선’도 그런 아이였다. 친구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이 서운하지만, 자신이 왜 슬픈지, 그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 “그냥”이라 말하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그 조용하고 불안한 몸짓 하나가 말보다 더 깊이 선의 마음을 내비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육교 위에 널브러져 계신 아빠를 모시러 간 선은 지아와 마주하게 된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수치심과 억눌린 감정이 겹친 그날 밤, 선은 결국 엄마와 아빠 앞에서 소리치며 참아왔던 마음을 터뜨린다. ‘그냥’이라는 말로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마침내 울음으로 터져 나오며 감정의 출구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 마음의 방향이 엇갈릴 때 – 상처로 표현된 친밀감의 욕구
친해지고 싶었지만, 마음의 방향이 엇갈리기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지아가 선의 집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엄마 품에 안긴 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다. 지아는 말없이 등을 돌리고, 그날 이후 조금씩 선을 멀리한다. 가까워지려 애썼던 마음은 순식간에 낯설고 차가운 거리감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것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아는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렸고, 그 감정은 잃어버린 애정에 대한 그리움과 소외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서툰 방어로 이어졌다. 친해지고 싶지만 상처받지 않으려 때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드러나며, 결국 자신도 아프게 만든다.
지아의 변화에 선도 서툰 방식으로 반응한다. 서운함과 외로움이 뒤엉킨 마음으로, 선은 보라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다 보라와의 대화 중, 무심코 지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흘리게 된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 말 한마디는 결국 지아에게 또 한 번의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선은 그 상처가 자신의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 다시 손 내밀기 – 작은 용기와 봉숭아물 같은 희망
피구장에서 지아는 친구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한다. 아무 말 없이 밖에 서 있는 지아를 바라보던 선은, 문득 자기 손톱을 내려다본다. 물어뜯겨 상처투성이가 된 손. 하지만 그중 네 번째 손가락의 손톱 끝엔 봉숭아 물 자국이 아주 가늘게 남아 있다. 지아와 함께 물들였던 그 봉숭아 색은, 어쩌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우정의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연다. ‘금 안 밟았어.’ 모두가 규칙 위반이라며 지아를 몰아붙일 때, 선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지아의 편에 선다. 그 말은 사과도 아니고 고백도 아니지만, 다시 손을 내미는 작은 용기였다. 이 장면에서 선이 얻은 용기의 씨앗은, 어쩌면 동생 현의 말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선이 왜 때리지 않고 그냥 맞기만 하냐고 물었을 때, 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럼, 언제 놀아?”
그 말은 너무 단순해서 대꾸할 수 없고, 너무 명확해서 잊히지도 않는다. 싸우고 삐지고 멀어져도, 결국 우리는 다시 놀아야 한다. 그게 아이들의 관계이고, 상처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다시 마음을 여는 이유다.
아동기의 우정은 생각보다 단단하며, 서투르지만 회복력 있는 감정의 연습장이다. 관계는 때로 아프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라는 중이다.
■ 관계로 자라는 마음 – 아동기의 성장 곡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동기의 '근면'은 단지 학습의 성취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우고, 관계 속에서 나를 알아가며, 때로 실수하고 다시 회복하는 모든 과정이 이 시기의 중요한 성장 과업이다.
영화 <우리들>은 그 과정을 너무도 섬세하고 진실하게 그려낸다. 누구보다 친구가 되고 싶지만, 오히려 그 마음이 상처가 되고, 침묵이 되고, 때로는 또 다른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시 웃고, 손을 내밀며 다시 한번 마음을 전할 순간을 조심스레 지켜본다.
성장은 그렇게 이어진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도 다시 연결을 시도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 다음 회차 예고
다음 회차에서는 청소년기의 정체성과 혼란을 다룬 영화 <문라이트>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볼 예정이다. [객원 에디터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