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성장의 심리학] 세상을 배우는 첫걸음 – 영화 '룸'

안전한 관계가 이뤄내는 성장에 대하여

2025-04-06     석윤희

“세상은 여기야, 룸이 다야.” – 영화 <룸> 중 잭의 대사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성장은 단지 몸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믿고,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하며, 나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배워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여정을 가장 깊고 섬세하게 담아낼 수 있는 예술 중 하나다.

‘영화로 읽는 성장의 심리학’은 인간의 전 생애 발달 과정을 영화 속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조망하는 연재 시리즈다.  첫 회는 영화 <룸 (Room, 2015)>을 통해, 생애 초기 발달 시기의 아이가 어떻게 신뢰를 배우고 세상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본다. 극단적 환경 속에서도 애착과 회복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함께 들여다본다.

■ 신뢰할 수 있을까? - 아이의 첫 심리 과제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태어남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 사이에서 균형을 배워간다. 이 여정의 출발점은 바로 영아기, 즉 생애 초기의 시기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이 시기의 핵심 과제를 ‘신뢰 대 불신(trust vs mistrust)’으로 보았다. 이는 아이가 세상을 따뜻하고 믿을 수 있는 곳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낯설고 두려운 곳으로 인식하는지를 가르는 심리적 기준이다. 

아이들은 생후 몇 년 동안 양육자의 일관된 반응과 따뜻한 돌봄을 통해 세상에 대한 기본 신뢰를 형성하고, 이는 평생 지속될 정서적 기반이 된다. 반대로 이 시기에 애착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거나 환경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하다면, 아이는 세상을 위협적이고 두려운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 구조를 영화 <룸>은 감금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폭력적 장면 없이 섬세하게 그려내며, 공감과 사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끈다.

■ <룸> - 폐쇄된 세계 안에서의 신뢰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룸>은 납치된 여성 ‘조이’와 그녀가 낳은 다섯 살 아들 ‘잭’이 작은 감금 공간 ‘룸’ 안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잭에게 세상은 한 평 남짓한 룸이 전부며, 단 한 번도 문밖 세상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서도 잭은 놀고, 웃고, 배우고, 자란다. 그 폐쇄된 작은 세상 안에서 심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조이’와의 안정된 애착 관계 덕분이다. 

조이는 제한된 자원 안에서도 일상을 조직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이에게 전이하지 않으려 애쓴다. 감옥 같은 공간 ‘룸’은 잭에게 심리적 자궁, 즉 안전 기지가 된다. 그 안에서 잭은 세상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 문을 연 이후 – 낯선 세상에서 다시 자라기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하지만, 문을 열고 맞이한 바깥세상은 잭에게 또 다른 벽이 된다. 광활한 공간, 수많은 사람, 복잡한 규칙...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다. 하지만 잭은 바깥세상에도 천천히 적응해 간다. 감금이라는 극단적 환경 속에서도 엄마와의 안정 애착 덕분에 잭은 세상에 대한 기본 신뢰를 잃지 않았다. 

할머니와 그녀의 재혼 남편 레오는 따뜻한 지지자이자 동반자로서, 잭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우며 조심스럽게 곁을 지킨다. 강아지 ‘셰이머스’를 키우며 잭은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을 처음 배우고, 이웃 또래 아이와 축구도 하며 조금씩 세상을 배워간다.

마침내 잭은 할머니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치료 중인 엄마에게 보내자고 제안한다.

“엄마에겐 지금 나보다 이 힘(머리카락)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잭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힘과 애정의 상징이었다. 그 머리카락을 스스로 잘라 엄마에게 주겠다는 제안은, 자아중심적인 아이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전환점이 된다. 이 장면은 어린 아기가 처음으로 ‘나’의 감정 너머에 있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잭은 만 5세로 학령기 전 연령에 해당하지만, 그의 회복력과 적응력은 생애 초기에 형성된 안정된 애착과 기본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 칼럼은 연령보다는 심리 과업 중심의 관점에서, 에릭슨의 ‘신뢰 vs 불신’이라는 영아기 과업을 중심으로 <룸>을 살펴보았다.

■ 조이의 치유 – 잘라낸 것들로 이어진 마음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잭의 성장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조이 또한 감금 상태에서 모성 역할을 통해 버티고 회복해 가는 인물이다. 

한편, 영화는 서로를 향한 작은 ‘신체의 조각’들을 통해 두 사람의 연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이는 잭을 세상에 내보내며 자신의 어금니를 쥐여준다. 그것은 고통의 흔적이자 존재의 증표이며, 잭에게는 엄마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의 단서가 된다. 

반대로 잭은 엄마의 회복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겠다고 제안한다. 엄마는 자신을 내어주며 아이를 세상에 보냈고, 아이는 자라난 마음으로 자신을 잘라내어 엄마에게 건넨다.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이 장면들은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 회복의 순간을 상징하며, 이들의 관계가 단순한 보호자-피보호자를 넘어 공감과 연대의 관계로 확장되어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와 다시 마주한 트라우마 속에서 조이는 흔들리고, 때로는 잭에게 위로받는다. 구출 후 병원 화장실에서 조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말한다.

 “우리야. (That’s us.)” 

이 장면은 더 이상 두려운 세상이 아니라, 함께라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정서적 선언처럼 들린다.

■ 룸과의 이별 – 성장을 위한 용기의 순간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마지막, 잭은 조이와 함께 과거의 공간, 그 룸을 다시 마주한다. 모든 상처의 치유는, 그 상처와 마주하려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잭은 감금의 공간이었던 작은 룸을 둘러보며 말한다.

“작아졌네.”

그 말은 단지 물리적 크기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이제 그 룸은 더 이상 그의 전부가 아니며, 그는 더 넓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곳에서 지냈던 나와 이별하는 순간, 잭은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이뤄내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 성장, 그 근원은 ‘안전한 관계’

[룸 스틸 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룸>은 한 아이가 어떻게 세상을 배우고 성장하게 하는지 ‘공간’이 아닌 ‘관계’를 통해 증명한다. 지치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안전한 관계가 있다면, 세상이 조금 낯설고 어려워도 견딜 수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겪는 성장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룸’ 안에서 태어난다. 그 안전 기지는 누군가의 품일 수도 있고, 반복되는 일상의 익숙한 리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얼마나 신뢰를 배웠는가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언젠가 또 마주하게 될 낯선 세상 앞에서도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 될 것이다.

■ 다음 회차 예고

다음 회차에서는 또래 관계 속에서 성장해 가는 아이들의 내면을, 영화 <우리들>을 통해 함께 들여다볼 예정이다. [객원 에디터 '심미안 연구소' 석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