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시스템 전복을 꿈꾸는 낙관적 우화

봉준호가 말하는 ‘죽음의 낙관주의’

2025-04-06     김현승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낙관적인 메시지를 품은 작품이다. 전작 <기생충>이 지독한 리얼리즘으로 사회 구조의 모순을 정밀하게 포착했다면, <미키 17>은 무국적적 배경과 유려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 구조에 낙관적 균열을 내는 시도다. <기생충>이 세밀한 정물화라면, <미키 17>은 거대한 벽화의 스케치와 같다. 봉준호의 유쾌한 블랙코미디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 이후 가장 가볍고 부담 없는 톤으로 진행되며, 심지어 <옥자>보다도 더 밝고 유쾌한 감각을 지닌다. <플란다스의 개>와 <옥자> 모두 생명체의 죽음과 학대 등을 깊게 다루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아마 가장 밝은 톤의 봉준호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키 17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미키 17>은 장르적으로는 오히려 익숙한 SF의 클리셰를 피하고, 인물 간 관계와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 연극적인 구조를 택한다. <듄> 같은 거대한 SF 서사를 펼치는 대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꼬며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영화는 여러 인물들이 유독 둘씩 짝지어 등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특정한 두 명 혹은 두 그룹 간의 관계는 대립과 착취, 조종의 구조를 이루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공존 혹은 동일시를 통한 각성으로 전환된다.

대표적인 예가 미키17과 미키18이다. 이 두 인물은 엄밀히 말하면 동일한 존재지만, 서사 속에서는 타인처럼 기능한다. 미키17은 미키18의 죽음을 통해 성장하고 자립하게 된다. 반면 또 하나의 인물쌍인 마샬 부부는, 한 사람이 죽자 곧바로 자살한다. 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결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하위 존재인 미키는 죽음을 발판 삼아 성장하지만, 지배자인 마샬 부부는 자신들의 권력과 우월감이 무너지자 삶의 이유를 잃는다. 크리퍼의 꼬리와 타인의 손목을 자르던 자들에게 어울리는 소스는, 결국 그들 자신의 피뿐이라는 날카로운 은유가 담겨 있다.

[미키 17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흥미로운 건, 미키18이 단지 미키17의 성장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특히 티모와의 관계가 그러하다. 죽음의 감각을 모르는 티모는 미키18에 의해 두 차례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되고, 결국 이를 통해 변모한다. 다리우스의 부하를 처치하고, 지배자 다리우스에서부터 해방되는 결말은, 미키와 티모가 '죽음을 경험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연결됨을 보여준다. 이는 <미키 17>이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성장할 수 있다는, 봉준호 특유의 기이한 낙관주의를 기반으로 서사를 짜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연결되는 상징이 바로 '버튼'이다. 미키18은 어린 시절, 버튼으로 엄마를 죽였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버튼을 눌러 스스로를 희생한다. 미키17 또한 이 희생을 계기로 성장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시스템을 착취해온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는 버튼을 누른다. 버튼은 곧 선택이고, 선택은 자립이다. 이때 미키는 "FUCK OFF"라는 대사로 상징되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 이러한 마샬 부인과의 백일몽 시퀀스는 이러한 성장이자, 지나칠 정도로 이상적인 공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키 17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인물들의 특성도 다소 흥미롭다. 카이라는 인물은 영화 속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데, 바로 지배층에게 대립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시스템 속에서 작은 지배를 원하는 인물이다. 카이는 피지배층의 상징과도 같은 미키라는 인물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유혹한다. 그녀는 지배층의 상징인 마샬에게 직언을 하는 당찬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미키가 제일 싫어하는 '죽을 때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을 하고, 나샤와의 협상을 통해 미키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직후 일어난 크리퍼들의 소동극에서 자연스럽게 지배층 마샬의 명령에 따라 크리퍼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후 그녀는 서사에서 퇴장한다. 이러한 점은 나샤와 대비되는데, 분명 나샤와 유사한 위치에 있음에도 나샤와 달리 그녀가 미키와 엮이지 못한 것은 나샤와 카이의 미키를 대하는 태도, 즉 피지배층을 대한 태도 때문이다. 나샤는 미키를 진심을 담은 사랑으로 대했다면 카이는 연민과 도구적 욕망의 충족 (카이의 동성 연인이 직전에 사망했음을 감안해야 한다.)으로 미키를 대한 것이다. 결국 <미키 17>은 피지배층과 지배층을 분리하는 시스템의 붕괴를 위해선 카이의 태도보다는 나샤의 태도가 더 적합하다고 역설한다.

또다른 주연인 지배자 마샬은 끝까지 소통을 거부한다. 그는 크리퍼들의 비폭력 시위에 대해 오직 가스로 몰살시킬 계획만을 세운다. 통역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의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되며, 이는 <기생충>에서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공감 불가능성의 연장선에 놓인다. 크리퍼들의 꼬리로 만든 소스를 음미하는 마샬 부인의 장면은 <설국열차> 속 꼬리 칸의 착취를 연상시키며, 비정한 계급 시스템의 폭력은 미각의 쾌락으로 은유된다.

[미키 17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중반부 크리퍼들이 바위 틈에서 등장해 벌어지는 소동극은 <괴물>의 병원 탈출 시퀀스를 떠올리게 하며, 영화적인 유쾌함을 잠시 선사한다. 정재일 음악감독의 웅장하면서도 기묘한 OST 'Mayhem'은 봉준호스러운 소동극의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최대치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 영화는 복제인간이라는 SF의 핵심 소재를 다루지만, 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나 장르적 쾌감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권력 구조라는 정치적 주제로 초점을 전환한다. 이러한 면은 다소 SF라는 장르의 장점을 제한적으로 다뤄 아쉬움을 남긴다. SF의 장점을 축소화시킨 대신 확장한 정치적 주제는 다소 넓고, 얕다. 이는 <설국열차>와 유사한 방향이지만, 훨씬 더 가볍고 평화로운 <옥자>와의 결합처럼 느껴진다. 결국 이러한 소동극은 <미키17>의 다소 직접적인 나레이션 및 대사와 뭉툭하게 엮이며 오락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밋밋한 연극이 되고 만다.

촬영 및 미술 또한 이러한 제한 속에서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한다. 우주선 안은 원색에 가까운 이미지며, 외부 또한 원색에 가까운 눈과 얼음이라는 단순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이는 선택과 집중이라고 볼 수 있지만, SF 장르를 표방한다면 무조건적으로 관객들을 실망시킬 부분이다. 촬영 또한 이러한 제한된 환경 속에서 크리퍼들의 소동극을 제외하면 별달리 뛰어난 시퀀스를 남기지 못하며 경직된 앵글과 샷 사이즈, 움직임만을 보여준다. 이러한 촬영은 단순한 미술 및 공간과 연결되어 관객들에게 풍자와 메시지에 대해 과하게 전달받을 가능성을 높이는 악영향으로 연결된다.

[미키 17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또한 <미키 17>은 한화 1000억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는데, 상당한 낭비처럼 느껴진다. 외국 평론 중 'SNL을 보는 듯하다'라는 평가처럼, 봉준호 감독 나름의 풍자를 위해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담론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전작 <기생충>이 장르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라는 평가를 받은 것과 유사하게, <미키 17은>은 장르의 구분이 없어 이야기가 밋밋해지는 평가를 받게 된 셈이다.

하지만 <미키 17>은 자본주의적 통제불능 상태에서 자신을 향한 스스로의 구원을 모색하는 이야기다. 연약한 나를 구하는 이는 더 용감한 또다른 '나'라는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는 체제 전복을 향한 낭만적 인간찬가이자, 옥자의 생태주의적 우화와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미키, 나샤뿐만 아니라 티모의 생존을 통해 강조된다. 티모는 죽지 않았지만, 죽음을 경험한 자다. 그 경험은 그를 변화시켰고, 이는 곧 자신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미키 17 스틸 컷,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이처럼 <미키 17>은 낙관적이고 몇 가지 단점들이 존재하지만, 단순하지는 않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나와 타인, 동일성과 차이의 경계를 반복해서 묻는 이 작품은, 자신을 둘러싼 억압적 구조에 맞서 싸우려는 모든 개인에게 조용히 말한다. 보잘것없는 당신은 바위를 깰 수 있는 계란일 수 있다고. [영화감독 김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