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선과 악은 어디서 오는가
복수의 연쇄 속에서 사라지는 경계, 인간은 선과 악을 나눌 수 있는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영화는 선과 악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책임감 속에서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주인공 류(신하균)는 청각 장애인으로, 장기매매단에게 사기를 당한 후 급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괴를 감행한다. 반면, 동진(송강호)은 유괴된 딸을 되찾으려 하지만 결국 딸을 잃고, 복수를 실행한다. 이후 동진이 죽인 영미(배두나)의 조직원들은 다시 동진에게 복수를 하면서, 복수의 연쇄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단 첫째로, 장애인의 가족은 기본적인 일상에서조차 책임감을 강요당한다. 조금 차가운 말일 수 있지만, 장애인을 챙기는 가족 구성원들은 비장애인들로 구성된 가족보다 선한 인물들일까?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이는 선함의 정도와 관련이 없다. 앞서 말했듯, 반강제로 요구되는 ‘책임감’이 주고, 그 외의 선함은 결국 개개인의 차이이다. 류가 장기를 구하려 한 것도, 복수하려 한 것도, 유괴를 한 것도 그 기저에는 ‘누나’의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 존재하지 않을까.
둘째로, 내 ‘책임’이 아닌 일에는 모두가 이성적일 수 있다. 유선의 유괴살인사건을 담당하던 형사는 동진과 애기하다가 차 밖에서 전화를 받으며 “우리 집은 그나마 다행이야, 돈이 없으니 유괴당하거나 하지도 않고…”라는 등 당사자와 굉장히 가까이서 상처가 되는 말을 한다. 그럼 동진이 덜덜 떨고 몇 번을 망설이면서도 결국 류를 죽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아마 류처럼 유선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결국 이 영화의 중심에는 ‘책임감’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감정과 상황에 따라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조명하는 것이다. 동진이 류를 죽일 때 주저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단순히 감정을 배제한 복수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영화는 이러한 인간 본성의 복잡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또한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책임감과 마찬가지로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 개념이 드러나기도 한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량 학살을 저질렀듯, 영화 속 인물들은 단순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행동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변모한다.
지금 우리는 동진의 옆에서 전화를 받는 형사처럼, 그 ‘악’이라는 걸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극 중 모두는 주어진 상황 속에 자신의 책임이라 느껴지는 것들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누가 자신의 가족이 장애인이 될 것이라 예상하는가, 누가 자신의 딸이 유괴당해서 시신이 되어 돌아올 거라 예상하는가. 혹은 누가 본인의 보직이 유대인을 학살하기에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라 예상하는가. 어느 누구도 특정한 그 상황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선과 악을 함부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무엇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은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가해자’이고, 누군가는 ‘피해자’일까? 영화는 이러한 도덕적 질문을 던지며, 선악의 절대성이 허상임을 강조한다. 박찬욱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철학적 깊이가 어우러진 이 작품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치밀한 탐구이자,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영화감독 정경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