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살아있음'을 회복하는 우주적 여정
죽음과 생명력을 향한 위치의 대비
광활한 우주, 위성 충돌이라는 사고로 인해 주인공 라이언은 소유즈 안에 홀로 남게 된다. 우주선의 창밖으로 보이는 건 생명력으로 충만한 지구와, 죽음의 진공상태에 놓인 우주의 암흑 뿐이다. 그리고 이를 홀로 응시하는 라이언의 동공 속에는, 위성 잔해의 충돌로 인해 처음으로 우주에서 길을 잃었을 때와 같은 공허와 체념이 담겨 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딸이 머리를 다쳐 허무하게 죽은 뒤로, 라이언은 정처 없는 운전을 계속해왔다고 밝힌다. 여기서 운전이라는 관성적 운동은 삶의 의지가 삭제된 허무주의적 움직임이다. 그리고 허무주의의 지고의 선은 바로 죽음이다. 라이언은 딸의 죽음이 추동한 ‘죽음의 상태’에 수동적으로 빨려 들어가 갇혀 버린 것이다. (죽음을 욕망하는 것 또한 라이언에게는 너무나 능동적이다.) 그러나 라이언의 ‘죽음의 상태’를 초래하는 원인에는 딸의 죽음만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녀는 ‘라이언’이라는 남성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동료 매트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며 그녀는 ‘아빠는 아들을 원했어요’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실마리가 드러난다. 어쩌면 ‘라이언’이라 불리는 일, 그저 이름을 불리는 일상적인 순간조차도 라이언에게 ‘아빠는 나를 원하지 않았어’ 내지는 ‘나는 잘못 태어났다’라는 자각을 불러일으켰을 수 있는 것이다. 딸의 죽음과 ‘날 원하지 않았다’라는 평생의 자각, 이 두 가지의 결합이 라이언으로 하여금 곧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살아있지만 죽어있음)에 서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심리적 위치가 ‘우주’라는 무중력의 공간으로 표현됐다고 본다. 그 죽음의 상태, 우주 속에서 라이언은 살려는 의지를 잃고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때 나타나는 게 바로 매트의 환상이다. 그녀에게 지구(삶)로 돌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매트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살아있다는 자각’을 획득한다. (어쩌면 매트라는 환상의 사라짐이 매트의 죽음을 확실히 인식하게 했고, 이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나는 살아있음’이라는 자각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이는 딸 세라와 매트를 향한 작별 인사에서도 두드러진다. ‘당신은 세라를 만날 거예요...’등의 말로 이루어진 라이언의 작별 인사는 곧 죽은 자(새라와 매트)와 산 자(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이 분리가 이루어진 뒤, ‘이제 운전은 그만 할래’라는 결의를 다지며 라이언은 온전한 ‘살아있음’-지구로 돌아간다.
결국 이 영화는 죽음의 상태에 고착되어 있던 한 여자가 ‘살아있음’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이는 환생의 과정을 거쳐야 할 정도로 지난하고 힘겨운 과정이다. 그러나 다시 ‘살아있음’, 어떤 실존의 감각을 회복했을 때 느끼는 쾌감은 무중력에서 중력으로의 이행, 마침내 두 다리를 펴고 땅을 디뎠을 때 느끼는 그것과 맞먹는다고 영화는 말해주는 것 같다. [영화감독 서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