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단편] 검정, 사랑의 색, 사랑의 필요충분조건
사랑은 상처를, 상처는 용기를, 용기는 사랑을 낳는다
- 사랑 -
사랑은 인류 최고의 난제 중 하나이다. 지난 몇 천 년간 인류가 기록을 통해 이 난제에 대해 어떻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싸워왔는지 남겨 왔지만 아직까지도 그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각자마다 여러 모습과 다양한 해석을 정리해 놨을 뿐이다. 그건 아마 사랑이란 존재가 단순한 언어와 몇 가지 공식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우리의 의식을 넘어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치밀한 존재여서 우리들은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바보가 되어 익숙했던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지 못해서일까?
주인공 시현도 사랑 앞에 선, 사랑 앞에 섰던 사람이다. 설렘과 떨림으로 처음 그와 마주한 순간부터 시현의 손가락도 재현의 손가락처럼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갔으며 마주앉을 사람이 나타났음을 직감했던 첫 만남, 책 속에 꽂아놓은 그의 메모 안에서처럼 모든 것이 어두워져도 함께 사라지지 않을 영원을 꿈꾸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현은 그때의 모습과 다르게 매우 고독하고 무거워 보인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현에게 익숙한, 우주에 관한 책을 읽는 어떤 남자의 손가락을 유심히 쳐다보지만 그의 손가락은 아직 물들어 있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에게 의미가 있는 단 한 사람을 구분 짓는 그 요소는 어쩌면 새끼 손가락에 있는 손톱 하나의 색깔일지도 모를 만큼 사소한 것이지만 그 사랑이 갖는 의미는 결코 그렇게 사소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시현에게 사랑은 그런 의미였다. 손톱 색깔 하나의 차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존재. 무의미한 우주 속에서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미처 사랑의 색으로 완전히 물들지 못했던 시현에게 사랑이 다시 찾아왔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암흑 속에서 갇힌 것 마냥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현은 친구를 구한다는 녹색 전단지를 발견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 전단지를 뜯게 되면서 마법과 같은 시간이 시작된다.
- 상처 -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또 하나의 화두는 바로 상처다. 우린 살면서 이러저러한 외부의 요인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아파하며 괴로워한다. 어쩌면 상처와 고통은 살아있음으로 생겨나는 필연적인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현은 피하고 감추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방법으로 상처받았던 당시를 외면하고 또다시 마주할지도 모르는 상처의 순간에서 도망쳐버린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환상 속 분명 그녀는 그 시절 재현을 피해 숨는 겁 많은 사람이었다. 박재현이란 이름이 담긴 명찰을 바라보는 시현의 불안한 눈빛과 불편한 소리는 시현이 그 시절을 어떻게 느끼는지 고스란히 느끼게 만든다. 깊은 환상 속 어두운 그림자 너머에 서 있는 상처를 마주한 시현은 재현의 명찰을 마주할 때 맞닥뜨린 불편한 소리의 배웅을 받으며 환상 속을 뛰쳐나간다.
우리는 이렇게 아픔이 남아 있는 순간을 추억할 때마다 그때 그랬어야 하는데 혹은 만약에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면서 후회에 빠질 때가 있다. 전단지에 나와 있던 하늘 공원 놀이터에서 만난 인형탈을 쓴 미지의 존재는 시간을 되돌리고 그녀가 문을 열고 도망쳤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는 마주하기 싫었던 그 순간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간다.
인간성이 말살된 가면 뒤에 숨어 소중한 사랑을 놀림으로 비아냥대는 박수 속에 시현의 몸은 점점 멍들어간다. 온 몸을 멍들게 만드는 그들보다 시현을 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자책감 그리고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가 자신을 향해 뱉어내는 아픈 한마디 한마디의 말들. 시현의 기억이 진실이든 아니면 그녀 스스로가 만든 왜곡된 허상이든, 그런 아픈 시간을 시현은 마주한다.
- 용기 -
원하지도 않았던 직면. 그저 돌아가고 싶었던 시현은 어떻게 돌아가냐고 미지의 인형탈에게 방법을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는 대답뿐이다.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는 환상 속에서 재현을 마주한 시현은 자신은 단지 얘기할 사람이 필요했다며 다들 왜 그랬을까라며 당시를 후회해 보지만 이런 후회 따윈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두터운 이불로 얼굴을 감추고 아픈 현실을 잊게 만드는 약들로 또다시 고된 지금을 외면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몸짓으로 큰 용기를 향해 나아갈 등불을 집어 든다. 미지의 존재가 하는 배웅을 받으며. 그 존재가 과거의 시현이었을지 아니면 비웃음으로 멍들게 만든 수많은 친구들과는 또 다른 친구였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현은 무엇이 펼쳐질지 모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후 깜깜한 동굴 저 끄트머리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에 재현이 서 있다. 이미 모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 사라졌지만 시현에겐 가면의 흔적만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 동굴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재현의 앞에 선다. 그리고 이제 그가 편히 숨 쉴 수 있게 억눌러온 가면을 찢어버리며 그를 놓아준다. 이제 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지금까지와 다르게 도망치지 않고 용기 있게 다가선 시현의 모습이 그동안 마주한 날들과 다르게 어둡고 무겁지 않다. 뭔가 달라진 아침. 시현의 손가락은 이제 온전하게 물들어 있다. 사랑의 색깔 검정으로.
- 검정 –
그들의 색으로 물든 시현과 성하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마주 선다. 사랑의 색 검정이 온전하게 물든 채로.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랑의 또 다른 단면을 목도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제목처럼 보이는 <검정, 사랑의 색>은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를 완벽하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은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바로 두려운 상처를 마주할 때 시작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용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관객에게 역설하고자 하는 영화다. [기자 유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