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괴상함을 향한 오해
서로가 서로를 괴물로 보고 있는 비극
괴물의 사전적 정의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괴상하게 생긴 물체’를 의미한다. 흔히 괴수영화에서 나올 법한 괴생명체를 일컫는다. 두 번째는 ‘괴상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화 <괴물> (2023)의 제목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는데, 그 덕에 관객들은 본인도 모르게 제목을 계속 떠올리며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과연 누가 괴물일까 하고..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괴물은 누구게?’)로 쓰였기 때문에 관객은 괴물이 과연 누구일지, 마치 범인을 추리하듯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영화는 총 3부로 나뉜다. 미나토의 엄마이자 싱글맘인 사오리의 시점인 1부, 미나토의 담임교사인 호리의 시점인 2부, 마지막으로 주인공 미나토의 시점인 3부. 이러한 서사 구조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인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라쇼몽>은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기 위해, <괴물>은 각자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오해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서사 구조를 택한 것이다.
1부 – 비인간적인 학교
1부에서의 사오리 시점의 ‘괴물’은 미나토의 담임인 호리 선생과 교장이다. 아들인 미나토의 이상 행동의 원인은 미나토의 말에 따르면 호리 선생의 폭언과 폭력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학교를 찾아가서 진상을 밝히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호리 선생과 교장은 어째 미적지근한 사과와 비인간적인 언행만 반복한다. 그녀는 교장과 호리 선생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없으며, 미나토를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2부 – 억울한 교사
2부에서의 호리 선생 시점의 ‘괴물’은 미나토와 교장이다. 호리 선생에겐 여자친구가 있으며 아주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잡지 등의 오타를 일일이 수정하는 것이다. 이는 호리 선생이 사실상 누명을 쓰고 교사에서 퇴직한 후 집에서 근신 중일 때 자신을 비판하는 기사의 오타를 수정하는 장면에서 한 번 더 강조되어 연출된다. 이러한 연출은 얼핏 보면 단순한 인물의 특성 정도로만 보이지만, 나는 이러한 장면이 호리 선생을 ‘동성애에 무지한 사람’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는 후반부를 제외하고 영화 내내 진실(미나토와 요리의 동성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호리 선생이 미나토와 유사한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다는 언급, 유일하게 이성 애인이 등장하며 성적인 암시가 나오며, 아이들에게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언행 등으로 보았을 때 호리 선생은 일종의 미나토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로 보인다. 미나토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토와 달리 호리 선생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원인에는 사회 풍조가 주요한 원인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오타 수정 취미에서 볼 수 있듯이 호리 선생은 옳음(남성에게는 남성성이, 여성에게는 여성성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점)을 강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지냈으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물이다. 미나토 사건을 쉬쉬하듯이 덮는 학교를 향해 반기를 들고 억울함을 표하며 잘잘못을 따지려고 드는 그의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인 것은 그의 여자친구다. 그의 여자친구는 1부에서 비인간적으로 보였던 호리 선생의 언행의 이유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 인물은 의도치 않게 호리 선생을 영화 내내 타인으로부터 오해를 사게 만들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작 중 인물들을 통해 언급된 호리 선생이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 또한 그가 여자친구랑 같이 있는 모습을 그의 초등학생 제자들이 SNS 라이브로 찍으며 퍼진 헛소문 때문이었다. 호리 선생의 여자친구는 작 중 3번 등장하는데, 처음과 두 번째 등장에서는 사탕을 먹고 있거나, 사탕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등장에서 여자친구는 호리 선생의 입에 사탕을 넣으며 너무 초등학생 제자들에게 애쓰지 말고 본인답게 행동하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그가 1부에서 비인간적인 행동(사오리와 상담 중에 사탕을 꺼내 먹는 장면. 아마 호리 선생 본인 딴에는 자신답게 행동한다고 한 걸 것이다.)을 한 원인이 드러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자친구가 마지막 등장할 때는 사탕을 먹거나,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때 호리 선생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다. 여자친구라는 인물과 사탕이라는 물건이 얼마나 밀접한 상징 관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부 – 진실
3부에서의 미나토 시점의 ‘괴물’은 요리와 자기 자신이다. 3부는 독특하게 초반에 잠시 교장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교장은 자신의 실수로 인한 손녀의 죽음 이후 의도와 결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1부에서의 비인간적인 행동, 마트에서의 행동(마트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몰래 발을 걸어서 소란 피우지 못하게 함) 모두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교장은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에 대한 진상을 가장 먼저 알게 된 후에도 사건 자체를 덮어 버리는데, 이는 손녀의 죽음 당시 자신 대신 남편이 사건을 덮고자 스스로 누명을 쓴 것과 같은 맥락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미나토는 성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요리를 통해 서서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사실상 3부에서는 1부, 2부의 모든 복선이 회수되며 미나토와 요리의 동성애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주변인들의 오해였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또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탄압과 무시가 자세히 묘사된다. 주요 배경인 학교라는 공간은 ‘작은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반 아이들의 요리를 향한 괴롭힘(여성적이라는 이유로 추정된다.), 괴롭힘이 옳지 않음을 알고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방관하는 교실 분위기, 행여나 같이 괴롭힘 당할까 봐 요리의 편에 서지도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 미나토 등 동성애를 향한 사회적인 탄압과 편견이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선명히 나타난다. 괴상하다고 미나토와 요리를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 괴상하게 보인다. 서로가 서로를 괴물로 보고 있는 비극인 셈이다.
물과 불의 이미지
<괴물>에서는 물과 불의 이미지가 많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상징성을, 불의 이미지는 영화의 진실을 가리게 하는 상징성을 가진다.
물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드러나는데, 첫 번째는 호리 선생의 금붕어 어항이다. 어항에 갇힌 금붕어 자체가 옳음을 강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성장한 호리 선생을 은유하는데, 호리 선생이 퇴직 후 이사를 위해 집을 청소하는 장면에서 금붕어를 어항에서 꺼내고 금붕어를 옮기는데 바닥에 물을 살짝 흘리게 되고, 바닥에 놓여 있던 자신의 반 아이들 중 하나였던 요리의 작문 글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작문 글을 통해 호리 선생은 진실을 알게 된다.
또한 영화의 중간마다 댐의 익스트림 롱 샷이 여러 번 길게 나오는데, 이런 댐 장면은 관객이 진실에 가까워졌거나 인물의 오해가 풀릴 때(다만 오해가 풀리면서 또 다른 오해가 생겨난다) 나오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물의 이미지로는 사오리가 찾아갔을 때 요리의 집을 찾아갔을 때 요리가 사오리에게 물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이 컷 전후로 요리가 글자를 거꾸로 쓴다는 점, 요리의 팔에 불에 덴 상처가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점들은 모두 후반부 진실에 대한 복선이 된다.
그리고 요리가 욕조 안에서 기절한 채로 미나토에게 구출되는 장면은 요리의 아버지가 요리의 동성애 성향을 이유로 요리에게 폭력을 행했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가장 영화 속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물의 이미지는 태풍이다. 태풍은 영화의 오해와 갈등을 모두 해소하는 역할을 하며 진실을 밝히는데 중요한 영화적 장치로 등장한다.
불의 이미지에는 걸스바 화재가 있다. 가장 핵심적인 불의 이미지이며, 영화 초반부의 주요 사건이다. 영화 후반부의 주요 사건이자 물의 이미지인 태풍과 시간 순서상으로도 완전히 대비된다. 걸스바 화재는 영화의 모든 크고 작은 오해를 만들어내며 진실을 가리게 만든다.
소소한 불의 이미지로는 미나토와 요리가 고양이를 화장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 전에 동급생인 키다가 죽은 고양이를 보는 미나토를 보게 되고, 이를 호리 선생에게 알려 호리 선생의 오해를 사게 된다. 이 장면 후로는 화장 중 불이 크게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미나토가 근처 물가의 물을 물통에 퍼 담아 불을 끈다. 이것 때문에 1부에서 미나토의 물통에 물가의 흙이 잔뜩 담기게 된 것이었고, 이것을 사오리가 발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사오리가 ‘미나토가 이상 행동을 한다’라는 오해를 굳히게 된다. 소소한 장면임에도 1부와 2부에 각자의 다양한 오해를 사도록 연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결국 불은 물을 끌 수 없지만, 물은 불을 끌 수가 있다. 오해는 진실을 궁극적으로 가릴 수 없고, 진실은 오해를 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영화 <괴물>은 결국 모든 오해를 극복하고 사랑이라는 진실을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니 사회가 아니더라도 주변인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오해가 씻겨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해와 관용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입견, 편견 등을 버리는 등의 개인적인 변화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선입견적인 옳음 속에 갇혀버린 사회 속에서 그렇게 외치는 듯이 보인다. [에디터 김현승]